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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12]



중국의 기반을 닦은 진시황도량형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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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인구 및 호구에 대한 기록은 한사군시대(B.C 108~82)의 호구수에 관한 기록이 <한서 漢書> 지리지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서 지리지는 한나라 역사를 기록한 <한서>에 들어간 지리지로 한나라 각 지방의 연혁과 함께 산천, 호구, 물산 등의 통계자료도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된 국가로 통계 기록을 처음 남긴 것은 한나라지만, 기초는 진시황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계를 위해선 각 나라 모두 하나의 동일한 도량형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진정 도량형 통일을 이룬 것은 바로 진시황이니까요. 그 외에도 진시황은 중국 통일왕조의 기반을 닦아 여러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주 역사 속 통계 -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 이야기, 함께 보실까요?



진시황의 중국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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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은 진나라 왕족인 영이인과 그 부인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여정 입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은 그 당시 중국은 수백년간 전국시대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거친 중국엔 일곱 나라가 있었는데 그 중 진나라는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진왕 영정은 국력을 바탕으로 나머지 나라를 합쳐 통일할 계획을 세우는데요, 하지만 아무리 강대국인 진나라라도 여섯 나라가 하나로 뭉쳐 대항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진나라는 다른 여섯 나라의 대신을 매수, 서로의 관계를 얽히게 만들고, 그 틈을 노려 하나씩 멸망시켜 결국 중국을 통일합니다.

중국을 통일한 진왕 영정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진나라가 영원토록 이어지길 기원하며 자신은 그 중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로 시황제 라고 칭합니다. 이후 후계자도 별도의 시호 없이 2세 황제, 3세 황제 라는 식으로 이어간다는 것이 진시황의 생각이었지만, 그의 사후 진나라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실현되진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먼저 황제를 칭한 제왕으로써, 그가 '제일 첫 번째 황제'라는 점만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죠.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

7개의 국가를 합친 진시황이지만, 통일은 완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후작업을 할 것이 많았습니다. 수백 년간 분리된 나라를 통일하였으니, 서로 간에 달라진 점이 많았던 탓이었죠. 그 중 하나는 바로 도량형 통일입니다. 당시에는 각 나라별로 도량형이 달랐는데, 통일제국 진나라에서는 하나의 도량형이 필요했던 것이죠.

도량형의 통일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가상의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와 B와 C라는 지방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있는데, A지방에서는 미터법을, B지방에서는 야드법을, C지방에서는 과거 동양의 리와 척을 단위의 기본으로 쓰고 있다면, 서로의 도량형이 완전히 달라 토지 통계나 물산의 통계를 내도 지방간에도 통하지 않으니, 국가에서도 제대로 된 통계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 직후 진나라의 상황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백성의 자로는 분명 맞는 길이인데 관리의 자로 재면 부족하게 측정되는 일이 많이 발생했던 것이죠.

그렇기에 도량형 통일은 국가 통치를 위해서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통일한 단위는 다음과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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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나라도 미터법을 쓰지만 많이 들어본 단위들이 보이죠? 진시황이 실행한 도량형 통일은 이후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쳐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통일한 도량형은 잘 알려진 만리장성 축조나 진시황 시대에 이루어진 군사도로 건설에도 이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량형의 통일로 전국적으로 토지나 물자 생산에 있어서 통일된 통계를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단, 진나라에서는 당장 통계를 실시한 기록이 없는데요, 진시황이 살아 있을 때는 국가와 도량형을 통일한 직후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나라가 혼란해지면서 통계를 낼 여유를 찾지 못하고 끝내 멸망하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된 도량형은 이후 중국을 재통일한 한나라와 후대의 중국 왕조를 거쳐 가면서 부족한 부분은 보완을 해가며 정책이나 산업에 이용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토지나 산업에 대한 통계가 가능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 등 동아시아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은 통계를 비롯하여 국가 정책이나 건축, 과학, 기타 산업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바탕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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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진시황은 말년에 이르러 폭정을 일삼고, 그의 후계자들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간신히 득세하면서 진나라도 무너지고 말았지만, 시대에 딸 어느 정도 변형은 거쳤어도 그가 통일한 도량형은 무시할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어떠셨나요? 우리가 알던 진시황과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 다음 주 역사 속 통계는 몽골제국이 세계를 지배한 방법, 통계 이야기에 대해 함께 알아볼께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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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11]





센서스의 어원, 로마 켄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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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마다 실시하는 인구주택총조사, 국가적인 규모의 인구 조사를 센서스(Census)라고 부릅니다.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고대국가에서부터 이루어졌는데요, 인류 최초의 인구조사는 기원전 360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실시했다 합니다.

다만 바빌로니아는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다는 사실 자체만 기록으로 남았을 뿐, 실제 결과까지는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구조사 결과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고대 로마의 인구조사 입니다. '센서스'의 어원 자체가 로마의 인구조사였던 '켄수스'를 영어식으로 읽는 것에서 유래되었을 정도인데요, 로마의 인구조사 켄수스, 과연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고대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 인구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로마의 인구조사 결과가 전해지는 것은 아우구스쿠스에 의하여 제정이 성립하기 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던 원수정 시기의 조사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의 인구조사 켄수스는 5년마다 '켄소르(Censor)'라고 부르던 감찰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죠.

<로마의 인구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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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인구조사를 한 목적은 세금 징수에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소개해드린 신라나 기타 다른 고대, 중세국가가 그랬듯이 로마도 세금을 걷기 위한 조사다 보니 오늘날처럼 전체 인구가 아닌, 세금을 낼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조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에 소개한 인구수는 로마의 전체 인구는 아닙니다. 위의 표에서 BC 70년의 인구가 91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 보이는데, 이는 자연 인구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로마시에 살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시민권을 부여한 것이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확대된 결과이며, BC 28년에 400만 명을 넘은 것은 성인남성만 조사한 것에서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조사하는 것으로 확대되었거나, 기존 조사에서 누락된 조사대상이 대거 보강된 결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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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로마 인구조사는 세금 징수에 활용되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용도는 군대 모집이었습니다. 켄수스는 로마시민을 그들이 가진 재산에 따라 5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는데, 군대 구성 역시도 이 계급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국가로부터 무기를 비롯하여 각종 보급품을 지급받는게 당연한 오늘날의 군대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될 일이지만, 당시 로마군은 군에서 무기를 포함한 필요한 모든 것을 개인이 직접 장만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재산이 부유한 사람은 더 엄중한 무장이 가능하고, 가난한 사람은 제대로 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산이 가장 많은 제1계급은 모두 청동으로 된 투구, 둥근 방패, 정강이받이, 가슴받이로 무장했고, 창과 검을 들고 중무장을 하였으며, 이들을 포함한 상위 세 계급이 중보병, 하위 두 계급이 경보병이 되었습니다.
특히 하위 계급은 특별한 무기 없이 적에게 던질 돌만 준비하였죠.

로마군은 고대 그리스에서 고안한 팔랑크스라는 방진대형을 진법으로 도입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중보병이 주력을 이루었으므로 고대 로마에서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군에서 더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책임을 맡는 것이 보편화 된 셈입니다. 로마군은 포에니 전쟁의 승리와 주변 원정 등으로 로마를 성장시키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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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켄수스를 바탕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군대를 동원하면서 도시국가로 출발하여 지중해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물론 로마 제국도 후기에는 혼란을 겪다가 멸망하였지만, 로마법이 현대법의 원천이 되고, 로마의 센수스는 켄서스의 어원이 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통계의 힘이 함께하여 가능한 것이기도 하였죠.


이번주부터 시작된 역사 속 통계 [세계사 편] 어떠셨나요? 한국사와는 다른 매력이 있지 않으신가요?^^ 다음 이 시간에는 통계로 중국의 기반을 닦은 '진시황의 도량형 통일'에 대해서 얘기 나눠볼께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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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10]





조선후기 통계세법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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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조선후기 중흥기를 이끈 임금, 영조' / ☜ 클릭 시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변화를 맞이하고, 기존 체제의 모순이 축적되면서 백성의 생활도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는데요, 그래서 실제로 정책을 실행한 적도 있고, 의견에만 그친 적도 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균역법을 실시한 영조

 조선시대 군역은 처음부터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에게 부과하고,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보인이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 모병제를 실시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는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중 하나인 군정의 문란으로 힘 있는 계층은 군포부과에서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다양하게 제시되었죠.

숙종 때에는 군포징수를 인정(人丁)단위가 아닌 가호(家戶)단위로 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호포론(戶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가 자제 및 유생(儒生)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游布論:儒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대신 돈으로 받자는 구전론(口錢論), 아예 군의 규모를 축소하여 군사비 자체를 줄이자는 등의 여럿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중 유력한 것은 호포제와 가호단위로 군포 대신 돈을 받는 호전제(戶錢制)였습니다. 일단 호구 통계를 바로 잡고, 이를 바탕으로 군포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들이었지만, 기득권층인 양반층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현 될 수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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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2년, 영조는 군포 문제 해결에 보다 박차를 가하여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설치, 양역에 대해 실태를 파악하고, 양인의 호구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743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영의정 조현명에게 양역실총(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1748년엔 이 작업이 완료되어 전국의 양정수와 군포필수를 조사 수록한 양역실총이 완성됩니다. 이를 통해 군포를 감필할 경우의 부족한 군포수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대책은 결포론과 호포론으로 여전히 대신 간의 의견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백성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고자 나서게 되죠..

1750년 5월, 영조는 창경궁(昌慶宮)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 직접 나가서 신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게까지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호전이 편하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양반층의 반대가 심해 시행하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그 해 7월, 다시 한 번 백성과 유생들의 의견을 듣고 군포 문제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균역청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줄어든 군포 수만큼 대체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렇게 하여 실시한 것이 균역볍입니다. 균역법으로 군포 징수를 1필로 줄인 대신,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하였습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가구와 인구 통계를 먼저 내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 수립 방향을 대신들과 토론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듣는, 왕조시대엔 생각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민의를 반영하여 새로운 정책 균역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에 소개해드린 세종대왕이 공법 시행을 위해 17만 명의 의견을 통계조사로 알아본 이후 왕이 적극적으로 통계를 활용하고, 애민정신을 담아 백성의 의견을 담아 정책을 시행한 사례일 것 입니다.^^

통계 누락과 정확한 통계를 강조한 정약용

균역법으로 군포 1필이 감해진 것은 백성의 부담을 줄인 개혁이었지만, 군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조나 그의 손자 정조는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실행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르진 못하였으며,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됨에 따라 삼정의 문란 또한 더 심각해지고, 조선의 국력도 약해지게 되죠.

이렇게 조선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는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의 개혁에 대한 저항과, 이 저항을 극복할 추진력이 부족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개혁을 방해하는 요소를 살펴본다면, 통계 문제 역시 들 수 있는데요, 조선 후기 인구는 기록상으로 약 700만 명으로 집계되지만, 1788년에 발간된 탁지지(度支志)에서는 가구가 14.9%, 인구는 26.7%가 누락되어 실제 인구는 1천만명 일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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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소개해드린 다산 정약용의 토지 통계, 기억하시나요?

조선의 엄친아,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정확한 호구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관할 고을의 실제 가구를 조사하여 이를 근거로 백성의 생활을 파악해서 가좌지부(오늘날의 주민등록부에 해당)를 만들고, 아울러 경위표(오늘날의 통계표에 해당)를 작성하여 지방 행정에 활용토록 주장한 것이죠. 이렇게 지방 통계들이 정확히 작성되어 모이면 국가 전체 통계가 튼실해졌겠죠?

정약용은 정확한 통계를 위해 조사를 하는 아전들의 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조사한 통계를 지도로 활용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주장은 당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 <목민심서>에서도 보여지죠. <목민심서>는 오늘날까지 지방관의 마음가짐을 담은 책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실제 정책에 활용되진 못하였습니다.



영조의 애민정신, 정약용의 개혁정신 모두 통계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21세기, 통계청은 정부행정에서 국민 생활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정확한 통계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구조사를 하는 아전의 정성이 중요하다는 정약용의 지적처럼, 오늘날 현장에서 조사하는 통계조사원도 통계교육원 등을 통한 교육으로 수준 높은 조사를 이루어지게 하고, 이렇게 모은 자료로 통계를 공개하여 다방면에 활용되고 있죠.

부정확한 통계가 나라의 혼란에 일조했던 옛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통계청의 정확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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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9]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학자, 정약용토지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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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오픈캐스트 /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 클릭시 링크로 이동됩니다.>



올해는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포> 등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가 연구한 분야를 보면 유학을 비롯하여 정치와 지방행정, 경제, 법학, 의학, 언어학, 과학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수많은 학문을 섭렵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거중기를 만듦으로써 이공계의 재능까지 보였으니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천재이자 엄친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약용의 학문체계를 오늘날에는 다산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 개인과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터져 나오던 조선 후기, 정약용은 혼란한 나라를 위한 사회 개혁안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엔 통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지요. 정약용의 통계 이야기, 함께 보실까요?



정약용의 토지개혁안, 정전론

조선은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나라였습니다. 조선 후기는 지주와 그 밑의 소작농이 있는 지주 전호제 였는데, 나라에서 세법 개혁을 하더라도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부담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백성 생활의 피폐로 이어졌으니, 조선 후기 사회문제 해결 방안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토지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학문이 없는 엄친아 정약용도 당연히 토지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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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약용이 처음에 제시한 것이 여전론(閭田論)이었습니다. 여전론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즉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한 마을을 1려(閭)를 단위로 한 토지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면서 공동 경작과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지주 전호제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것인데요, 공산주의의 농낭(農糧)운영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무 이상적이라 정약용 스스로도 실현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의 저서 <경세유표>에서 다시 토지개혁안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정전제(井田制)입니다.

정전제는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 제도로 중국 고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서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중국에서는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정전제를 다시 시행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채택되진 못 했다고 하네요.

조선에서도 지주 전호제의 확대 이후 주장되었는데, 정약용 역시 토지개혁방안으로 여전론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 정전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정전제에 반대하는 주장은 중국과 조선의 토지와 인구 규모의 차이를 들었습니다. 또한 산지가 많은 한반도에서는 우물 정으로 토지를 나누기도 어려운데요, 하지만 정약용은 정전제는 실행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통계 조사의 필요성이 포함되어 있었죠.

정약용은 농민에게만 경작권을 주면서 가족 중에서 노동에 가담할 수 있는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사람이 5명 이상일 경우에는 1결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하고, 4인 이하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1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경작하도록 주장했습니다. 만일 실행 시에는 농민과 농민이 아닌 자, 그리고 농민의 가족사항과 토지 경작능력을 기준으로 경작권을 주므로 상세한 호구조사가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정약용의 계산으로는 4촌을 묶어서 이(里)로, 4리를 묶어서 방(坊)으로, 4방을 묶어 부(部)로 만들면, 농사 하지 않는 호(戶)를 통계하면 4부 백성이 3천여 호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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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당시에 세금을 피하는 유랑민이 많았는데, 정약용은 세금을 영구히 면제하는 관전(官田)을 만들고, 군사에게 경작하는 둔전으로 활용해 국방과 토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법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둔전제 자체는 동양에서 고대부터 활용된 방법으로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도 둔전을 두었는데요, 정약용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여기에 통계 활용을 더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과거 토지, 호구 등의 통계를 정리한 문서를 장적(帳籍)이라 하는데, 정약용은 매년 동지에 관찰사가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경작하는 관전에 대한 통계인 신기전장적(新起田帳籍)을 거두어서 경전사(經田司)에 보고하면, 경전사에서는 8도 신기전 장적을 통계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한 다음 9등급으로 분간하고, 위로 3등급은 상을 내리고, 아래로 3등급은 벌을 내려 토지의 질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정약용은 곡식 소출에 대한 통계 등을 제시하면서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는데요, 하지만 당시의 기득권층인 지주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부족하였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토지 개혁 방향을 제사하였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런 토지 개혁은 조선에선 실행되지 못하여 지주 전호제가 유지되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소작농이 지주 밑에서 농사를 하는 체제는 이어지다가, 해방 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 체제가 붕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 121조 1항에서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시하여 정약용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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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뛰어난 식견을 가졌지만, 우리는 그 식견을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로 알 수 있다는 건 끝내 그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정약용의 생각이 궁정에 반영될 수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우리가 현재 아는 것과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우리 역사 상 가장 존경받는 학자 중의 1명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이시간에는 한국사 통계 마지막 이야기, '조선후기 호구조사와 세법 개혁'에 대한 재밌는 통계 역사 알려드릴께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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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보는 조선의 신분제

조선후기 신분통계양반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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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신분제는 공식적으로는 양천제와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는데, 노비가 아니면 모두 양인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등 노비를 제외한 모두가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4개 신분으로 나뉘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조선 건국 초기엔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양반은 5%로 내외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분제가 철폐된 지 오래되어 의미가 없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집안은 양반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숫자가 많죠. 그럼 조선 초기에 소수에 불과했던 양반이 어떻게 증가했을까요? 조선 후기의 호구 통계를 보면 신분층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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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선 양반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볼까요? 고려시대에도 양반의 개념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확립된 건 조선시대 입니다. 어전회의를 할 때 북쪽에는 왕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는데, 그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라 불리던 것이 양반의 유래라고 합니다.



귀족과 양반의 차이는 귀족이 양반에 비해 훨씬 더 가문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세습적 신분으로 고려시대 가족은 음서제로 관직이 세습되고 귀족 신분도 세습되는 것이었지만, 양반은 관리가 된 사람들이었으며, 나중엔 4대 안에 관리가 된 조상이 있는 집안은 양반 집안이 되었습니다.


반면 양반 가문이라도 오랫동안 관리를 배출하지 못하면 신분이 하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될 수 있는 숫자는 한정되어 있으며 오랜 기간 과거를 준비하면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력도 필요했기에 조선의 신분이 공식적으로는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고 해도 관리가 될 수 있는 계층은 한정될 수 밖에 없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신분이 세분화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양반이 되면 군역 등의 역이 면제되는 등 특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면 양반으로의 상승만을 원하기도 했지만, 양반 신분도 사실상 가문 대대로 이어져오다시피 하므로 실제 상승하기란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공명첩의 발행, 관직 매매, 족보 위조로 양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조선 후기 대구에서의 호구조사 결과가 남아있는데, 이 내용을 보면 양반층이 증가한 통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료를 토대로 1690년을 제1기로, 1729년과 1732년을 제2기로, 1783년과 1786년, 1789년을 묶어 제3기로, 1858년을 제4기로 나누어 정리한 결과가 있는데요, 바로 아래의 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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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4기인 1858년에 이르면 양반이 차지하는 비중이 70%를 넘어갑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대구 지역의 통계로, 다른 지역세서도 양반층의 증가는 나타났지만 비율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 울산에서의 호구 통계를 이를 보여주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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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서는 양반층이 대구보다 더 늦은 1867년의 통계에서도 65%를 넘은 수준인데요, 이는 대구의 경우 조선 후기 울산에 비해 도회지로 더 발달하여 부유한 사람이 많았고, 이들이 재산을 바탕으로 양반층으로 진입한 결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지역별로 발달 정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양반층의 증가는 전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분의 변화에 대한 통계가 대구, 울산에서만 남아 있어 조선 전체에서 정확히 알긴 어렵지만, 타 지방에서도 약간의 정도의 차이를 보이며 양반의 증가는 뚜렷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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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양반이 조선 후기 증가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반론도 있습니다. 상기에 소개해드린 통계는 엄밀히 말하여 양반, 상민, 노비를 구분하여 낸 통계가 아닌 것을 후대의 연구로 분류한 것으로, 본래를 세금 부과와 부역, 군역의 부과를 위한 정리였습니다.



이 통계에서 양반이 증가하였다고 분류한 것은 이 시기 유학(幼學)이 대거 증가하여 이 숫자를 양반에 포함시킨 것인데요, 유학은 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를 준비하며 학교에 재학 중인 유생(儒生)을 가리키는 것으로, 관직에 나가진 않으나 역시 역이 부과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래 양반이 아닌 중이나 상민이 군역 등을 피하여 유학에 편입한 사람이 증가한 것인데, 유학에 이름은 올렸으나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는 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만큼 이들까지 양반으로 분류하는 건 무리이며, 구한말까지 양반으로 부를 수 있는 계층은 5%에도 못 미친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게다가 지역 사회 양반들은 서로의 가문에 대하 잘 알고 있어 편입도 쉽지 않았다는 의견도 이를 뒷받침하며, 또한 조선 후기는 세도정치와 부정부패, 삼정의 문란 등으로 행정체계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당시의 통계가 정확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으며, 지금 국민 누구나 양반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구한말에서 근대시기에 신분제가 붕괴하면서 이루어진 족보 조작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폭발적인 양반 증가는 착각이고 통계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군역과 부역을 피할 목적으로 유학에 편입한 사람이 증가한 것은 사실로 보여지고, 유학이 이전엔 공식적으로는 양인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하지만 사실상 양반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는 점에서 여기에 편입한 증인이나 상민이 증가하였다는 점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 변화 중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지배신분 계층인 양반과 관련된 역사 속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이 시간에는 우리 역사 속, 가장 사랑받는 학자 중의 한 명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토지개혁과 토지 통계 이야기를 전해드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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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7]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토지 통계, 광무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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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다' / ☜ 클릭 시 해당 페이지로 이동됩니다>

 

1987년 10월 12일, 고종은 조선을 새롭게 하여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정합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는데요,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기에 이 개혁도 '광무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광무개혁 내용 중에는 토지 통계를 다시 내는 양전(量田)사업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이 역시 연호를 따서 '광무양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토지 통계라 할 수 있는 광무양전,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광무양전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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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병폐가 진주민란으로 터진 이후 양전 사업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고종 즉위 후 섭정을 한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어느 정도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양전 사업까지는 진행을 못하였고, 이후로도 개항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의 대사건이 이어지고, 조선 정부도 혼란해지면서 양전사업을 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인 1898년 6월 23일, 내부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의 연명으로 '토지측량에 관한 청의서'를 의정부에 제출하면서 양전사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됩니다. 그래서 7월 2일 양전담당기관으로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고, 관련 칙령이 반포되면서 토지소유관계 파악과 지세수입 증대를 위한 양전사업이 진행됩니다.

 양전사업은 측량 조사와 양안제작의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측량은 양무위원과 학원이 한 조를 이루어 진행하고, 지역 실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조하게 하였습니다. 측량은 양전척(1척은 약 1m)으로써 실측하여 하루에 120필지 내외를 측량하였고, 양안 제작은 3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1단계로 측량 및 조사 내용을 '야초(野草)'로 작성하고, 2단계는 지방 관아에서 면별로 작성된 '야초책'을 면의 순서에 따라 자호와 지번을 부야하면서 면적·결부·시주·시작·사표 등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하여 '중초책(中草冊)'을 작성하였으며, 3단계로 양지아문에서 이를 수합한 다음 게재형식을 통일하여 '정서책(正書冊)'을 작성하는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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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원구단>

 

1899년 충남 아산을 시작으로 실시한 양전사업은 1901년 12월 중단될 때 까지 2년간 경기도 1부 14군, 충북 17군, 충남 22군, 전북 14군, 전남 16군, 경북 27군, 경남 10군, 황해 3군 등 합계 1부 123군에서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1901년 10월 20일 설립된 지계아문(地契衙門)에 의해 1902년 3월부터 양전사업이 재개됩니다. '지계'는 토지 소유권 증명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토지 소유 문제를 정리하면서 양전사업의 권한까지 인계 받은 것입니다. 지계아문은 경기 7군, 충남 16군, 전북 12군, 경북 14군, 경남 1부 20군, 강원도 26군 전체, 합계 1부 95군에서 양전사업을 진행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으로 중단하고,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일제의 사실상 속국이 되면서 재개되진 못하였습니다.



광무양전의 의의와 한계

광무양전은 근대적 실측법을 도입하고, 조선시대의 토지 소유권을 근대적 소유권으로 이행하였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 역시 컸는데요, 광무양전의 중단은 러일전쟁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도 한계점을 가져 성공을 장담하긴 어려웠습니다.

우선 광무양전이 근대적 측량기술을 도입하려 했지만, 아직 근대기술에 익숙치 않은 대한제국으로서는 토지측량기술이 불완전한 면이 컸습니다. 그리고 토지 소유권은 기존의 문서인 양안을 기초로 하였는데, 양안 자체가 이미 조선 후기 혼란 속에서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기에, 이를 토대로 한 토지소유도 제대로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양안의 혼란과 지금의 토지소유와는 개념이 다른 조선시대의 관념으로 서류상으로는 국유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유지도 적지 않았는데, 양민을 기준으로 하면서 이런 토지는 모두 국유지로 편입하여 토지 분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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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극기>

 

그리고 근대적 토지제도를 위해 실시한 광무양전이지만, 정작 대한제국 자체는 봉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보면 2조가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오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체 정치이니라'라 규정하고, 이 외 조항도 황제의 권한을 강력히 명시하여 근대적 입헌군주제와는 거리가 먼 전제정치를 법으로 규정할 정도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왕권이 사간원을 비롯한 삼사의 견제를 받던 조선보다 더 전제적이기도 했습니다.

광무개혁도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근대사업도 왕실 주도로 이루어지는 면이 컸기에, 근대 문물이 도입되었음에도 실질적인 의도는 전제 권력 강화라는 복고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광무양전, 그리고 이와 함께 진행된 지계사업 역시 광무개혁의 일부로 정권의 봉건을 극복하지 못하였기에 토지소유관계의 파악과 지세수입의 확보라는 목적 달성도 실패하였습니다. 근대적 토지조사는 꼭 필요했지만, 정작 당시 정권이 전제왕권 강화와 봉건성을 극복하지 못하여 진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러일전쟁과 일제의 침략에 직면하면서 실패하였고, 이는 양전사업 이외의 광무개혁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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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6]


대동여지도 속에 담긴 통계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도라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리실 겁니다.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대동여지도>는 지형이 정확히 기록된 것도 물론이지만, 여백에는 별도의 도표를 삽입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통계 정보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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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까요?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때는 고종 초기,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무렵입니다. 어린 시절 김정호 위인전에서는 <대동여지도>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지도는 많이 부정확하였기 때문에 김정호는 자세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백두산은 여덟 번이나 올라가며 지도를 만들어, 마침내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지만, 그걸 몰라본 조선 정부는 김정호가 적국을 이롭게 한다며 하옥시켜 죽이고,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불태워 없앴다.

과거에 위인전에 이런 내용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정호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것과는 달리 관리의 협조를 받아 행정용이나 군사용 지도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일부 지역을 답사했을 수는 있지만, 김정호가 조선 전체를 다 확인해야 할 정도로 당시의 지도가 형편없는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의 지도가 일치하는 지역이라면 굳이 답사할 필요까진 없었을 겁니다.

목판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는 데다가, 舊 총독부 건물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지하 수장고에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이 발견되어 조선시대에 불탔다는 것도 거짓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정호가 힘들게 <대동여지도>를 만들고도 탄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 일제강점기 때 교과서 <조선어 독본>에 그렇게 실린 영향 탓입니다. 지금은 학계의 연구로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릴 때 위인전을 읽은 영향인지 아직도 잘못 아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완전히 새로운 지도라 훌륭한 것이 아닌 기존 지도의 집대성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겠죠?


<대동여지도>에 담긴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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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습니다.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책으로 인쇄할 때의 면수는 213면입니다.



여기에 부록에 해당하는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추가되어 실질적인 도엽은 126목판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으로 접으면 책처럼 지역별로 볼 수 있고, 펼치면 하나의 큰 지도가 됩니다.





<대동여지도>를 사진으로만 볼 때는 크기가 실감이 제대로 잘 안 나지만, 실제 크기는 가로 4m, 세로 7m에 달하여 큰 방의 바닥에 펼쳐 놓아야 제대로 살 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동여지도>의 제1첩에는 지도 여백에 지도표나 도성도(都城圖), 경조5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고, 제2첩 여백에는 당시의 지역별 통계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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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동여지도>에 따라 조선 후기의 지역별 인구, 호구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는 600만 명을 넘어가는데, 이는 정조시대 760만을 넘긴 기록이 있는 것에 비하여 줄어든 것입니다. 정조시대와 흥선 대원군 집권기 사이에 큰 전쟁이 없는데도 인구가 줄어든 것은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유랑민 증가로 통계로 벗어난 인구나 죽은 사람이 늘어난 결과로 보입니다.

통계의 문란이 나라의 문란을 부르다 - 삼정의 문란 (클릭 시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대동여지도>에 실린 통계정보 내용은 지역별 인구와 호구 수 외에도, 당시의 통신과 교통 체계인 지역별 봉수대와 역참의 숫자, 창고의 숫자, 지방에서 국고로 들어오는 곡식의 양, 토지, 군사시설 등의 통계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조선의 각 지방에 대한 여러 가지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작한 역사왜곡 임에도 불구하고, '외적에 도움을 준다는 누명으로 김정호는 옥사하였다' 라는 내용이 믿어졌던 건 지도가 정확한 것 외에도 위처럼 상세한 정보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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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정보와 통계의 결합은 오늘날에도 국가행정은 물론 산업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하여 지역별로 소비자 현황이나 매출액 같은 통계정보를 파악하여 마케팅에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도에 통계정보를 더한 <대동여지도>나 지난 주에 소개해 드린 지리지는 지리정보와 통계정보를 결합시킨 선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계청이 진행하는 인구주택총조사와 경제총조사 역시 지역단위로 진행하기에 과거의 지리지나 <대동여지도> 같은 지역별, 그리고 전국적 통계정보를 망라하는 점에서 비슷한데요, 여기에 현대에도 지리정보시스템과 통계정보를 결합해 활용한다면 더욱 유용하게 우리 삶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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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www.xn--jackenonlinesterreich-sec.com 2013.12.15 05:13 신고 ADDR EDIT/DEL REPLY

    상있angst oder stress- erh ? hen höhle noradrenalinspiegel im gehirn . dadurch werden mehr stelle für das erinnern wichtige moleküle ein sterben oberfl ? che der nervenzellen gebracht und erm ? glichen so , dass. m ? verwendung sich leichter eine bestimmte situationen erinnern . das haben forscher ähm hailan hu vom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 in new york im fachmagazin herausgefunden und zell ver ? 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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