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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나의 가계부는 스마트하게 변신 중


70대 노부부와 40대 노총각을 둔 가구 이야기다.

 가계부를 노부부가 주로 작성하고 계셨으나, 미혼자녀는 가계부를 쓰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가 가계부를 쓴다는 건 쉽지 않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반쪽짜리 가계부를 제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 아드님 좀 만날 수 없을까요? 가계부를 써야 하는데요...?” 하며 말 꼬리를 흐린다.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너무 바빠서 안 될꺼여.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일하느라고 밤 샐 때도 많어.” 하시는데 막막했다. 처음엔 바쁜 아들 방해 될까봐 전화번호도 알려주시지 않았었다. 바쁜 아들 귀찮게 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그러시는 줄은 알겠지만, 그래도 꼭 만나야 하는 나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그래서 조금은 아쉽고, 조바심도 났지만 천천히, 느긋한 방법으로 가자, 그리 생각하면서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만족했다. 


그러는 것을 몇 번 했을 때 쯤, 우연찮게, 아님 어머니가 나의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넌지시 아들의 쉬는 날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드디어 아들과 면접을 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그는 무척이나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친해지려면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은 사람 말이다. 그래도 면접은 나름 순조로웠다. 조사목적과 지금처럼 아드님 협조가 없는 반쪽짜리 가계부가 가져오는 비표본 오차와 문제점, 통계적 오류, 신뢰성 등을 설명 해주었다. 처음 면접인데도 불구하고, 조금은 어려웠을 설명에도 나의 말에 수긍을 하며, 써주겠다 하였다. 그리고 일단 급여명세서와 고정적인 지출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처음의 면접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나름 안심을 하였고, 믿고 기다렸다. 그런데 역시 그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 다음 월초가 되어 회수를 할 때면 부모님의 가계부만 있을 뿐 아들의 가계부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밥도 사먹었을 테고, 친구랑 영화도 볼 수 있고 ,술 한잔 마시기도 했을텐데...’ 흠....

 공장에서 기계조작을 하는 직업이라, 전화 통화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또 그는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그리고 나는 현장조사원의 애환을 가슴에 안고, 또 다시 그 아들에게 연락을 하고, 면접을 시도하기를 몇 번.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져 가고 있을 때쯤. 그렇게 써주겠다는 약속을 받고도 속고, 또 속고를 몇 개월을 반복하던 어느 주말....... 내 카카오톡에 새 친구가 보였다. 나를 속이고, 또 속이는 그 아들이었다.


그동안 폴더폰 이었는데 스마트폰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기회다 싶어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스마트폰 장만 하셨네요? 축하해요. 가끔 카카오톡 해도 되지요?” 

 하며 소심한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를 안받아주면 어쩌나 초조해 하고 있는데 예상외로 대답을 해주었다. 


<유머 동영상 보내 주며 탐색 중>


 얼굴 보면서 대화는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는데 나의 카카오톡에 반응을 보인 것 이다. 아마도 스마트폰이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고,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 하는 건 부담이 훨씬 안 가기 때문 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은 단순했다. 그날의 

 안부를 묻거나, 재미난 동영상이나,  유머를 보내주며 편한 친구처럼  다가갔고, “요금제 바꾸셨어요? 요금제 바꾸실 수 있는 기간이에요. 까먹으셨죠?”  요금제 변경 기간을 알려주는 등의 그의 일상을 챙겼다. 그러면서 스마트 폰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 스마트한 세상을 알려주겠다며, 휴대폰의 여러 기능을 알려 주기 시작했다. 특히 사진을 찍어서 카톡에 첨부하는 기능을 알려 주었다. 워낙에 무뚝뚝한 사람이 이런 기능들이 신기하기는 하였는지 하라는대로 잘 따라했다. 


 <급여명세서는 기본,종신보험 자진 신고중>


그렇게 해서 나는 그의 스마트한 변화로 급여명세서, 현금영수증 내역서, 마트영수증 등을 카톡으로 받기 시작했다. 매번 똑같이 적어야 했던 나의 가계부 급여명세서 내역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스마트폰의 카카오톡 앱을 통하여 조사에 협조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미완의 가계부는 점점 더 완벽해져 갔고 스마트해져 갔다. 나의 현장 조사는 조금씩 쉬워지고 있었다.


  “경조비는 없어요? 로또는 얼마나? 이발은? 조카들에게 준 용돈은?”  처음엔 “그런 것 까지 뭐 하러 적어요?”라며 냉소적이었던 사람이 이 공간에선 순한 양이 되어 술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나간다. 

 

 아직은 수동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카카오톡으로 얻어낸 자료건수가 점점 늘어 평균 80건 정도의 자료에서 이제는 130건을 훌쩍 넘기는 알찬 자료가 되었다.

 

 구멍 난 것처럼 비어 있던 가계부의 내용이 한 줄 한 줄 채워질 때마다, 그 뿌듯함과 희열, 감동, 그 감사함이란...

 조금은 거창하겠지만,10년이 다 되어가는 조사원 생활에서의 여러 굴곡진 고개를 묵묵히 넘긴 그에 대한 갚진 보상, 비표본 오차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나에게 내려준 선물 같은것. 이런 것들이 통계조사원으로서의 질긴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작은 힘이 되는 등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새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조사구였다.  60대 부모님과 결혼한 딸 내외와 손자로 구성된 대가족이었다. 가계부 구역이라 설득을 해야 하는데 대가족인 것도 부담이었지만, 딸이 서른 초반에 뇌출혈로 두 번이나 쓰러져 대수술을 받았고, 게다가 6개월이 넘는 재활치료에도 불구하고 언어마비와 편측 운동신경 마비의 1급 장애인 판정을 받은 상태여서 더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설득도 설득이지만, 뽀얀 피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미모의 소유자에 4살 난 아이를 든 엄마라 더더욱 마음이 아팠다. 

 

 아픈 아내 때문에 서울에서 일식집 주방장으로 일하던 아이 아빠도 혼자 힘으론 아내를 돌볼 수 없어 처가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쉽사리 가계부를 써달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 집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이런 사정도 저런 사정도 피해 갈수 없는 통계표본의 씁쓸함을........ 대체할 만한 가구도 없으니 설득할 수밖에.


 여러 번의 방문과 설득 끝에 60대 부모님은 어렵사리 써주시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딸 내외가 문제였다. 아무리 함께 산다지만 결혼한 딸 내외의 살림살이까지는 알 순 없는 법.   딸과는 의사소통은 안 되었고, 사위는 활어차 운전을 하여 새벽 5시에 나가 밤 10시에나 귀가하는 고된 일을 하는 형편이니 가계부를 써달라고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무리인 듯 했다. 그래도 사위 바쁘지 않은 시간에 전화 통화로 보완해가며 가계부를 써 나갔다.

 하지만 운전하는 사람으로 통화시간도 짧고, 혼자서 생계를 다 책임지다보니, 여러 가지를 물어 본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서 보완은 보완일 뿐, 마음이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사위가 활어차 일이 너무 힘에 부쳤는지 예전에 서울에서 하던 일식주방장이었던 경험을 살려 조그마한 퓨전 일식집을 오픈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병원비로 빚까지진터라 그 흔한 오픈 광고도 하지 못하였고, 가게도 외진 곳에 위치하여서 장사가 그리 잘 되고 있지는   않은 듯 했다. ‘내 담당가구에서 개업을 했으니 

 팔아도 줄 겸 한 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는 사무실직원들 몇 몇과 함께 가게를 찾았다.

 

 <카카오스토리로 가게 홍보중>

 

 음식이 나오자 가게 홍보를 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정갈한 음식들을 맛깔스럽게 찍어 카카오스토리에 올렸다. 같이 간 직원들도 동참하며 자신의 카카오스토리에 나의 스토리를 공유해 올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댓글 반응이란........ 여기저기서 위치를 묻고 다음 약속 장소를 잡는 등 새로운 가게에 대해서 많은 지인들이 무한 호기심들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같이 함께 하지 못했던 사무실 직원들도 아름아름 

 아는 분들에게 그 가게를 추천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가계부 회수를 위해 조사구를 가게 되었다. 그때 만난 사위는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올린 스토리와 공유해서 올린 스토리를 보고 오는 손님이 많다면서, 본인도 카카오스토리 홍보효과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 하였다. 그리고 통계청에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카카오스토리의 홍보가 이렇게까지 효과가 있나 싶어 나 역시도 의아했지만 나의 스토리로 인해 부부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나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사정이 어려운 가구에게 조사를 부탁했던, 조금은 미안하고 안쓰러웠던 마음도 가시는 듯했다. 꼭 내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미력하게나마 홍보를 해주고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내 일처럼 기뻤다. 그리고 그 뒤로도 대상 가구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사무실 직원들도 자주 찾아주어, 조사가구에게 열심히 보탬이 되어 주시는 모습에서 진한 동료애까지. 스마트 폰 하나에 여러 따뜻한 마음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 마음들이 모여서 몽글몽글 무언가가 만들어졌을까?

   

  조사에 협조해주기 어려울 만큼의 장애를 지닌 민씨가 스마트폰에 지출한 내용을 적기 시작했고, 영수증도   모아주었다. 연필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손힘이 없는 그녀였는데, 한 글자 한 글자 자판을 누르는 것이 매우 힘

 들었을 텐데....... 스마트폰으로 가계부를 써 주기 시작한 것이다. 

  

<조사가구원 민씨가 작성한 9월분 가계부 내용 중에서>

 

 온 식구가 나의 그 작은 노력에 고마워하시는 모습에, 민씨가 어떻게라도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어렵게 자판을 눌렀을 모습을 생각하니, 또 한 번의 뭉클함이 전해져 온다. 그렇게 어렵사리 써주는 가계부와 함께, 5식구의 엄청난 양의 가계부는 입력 중에 자료가 날아가는 불상사가 생겨 다시 입력하는 일이 종종 생길정도로 민씨와 그의 가족이 써주는 가계부는 신뢰받는 통계생산에 무척이나 큰 일조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난 SNS를 통해서 가족과 지인들과의 소통뿐만이 아닌, 내가 일하는 일터에서도 조사자와 응답자와의 관계지만 내 가족처럼, 때론 친구처럼, 언니처럼 그들과 소통할 수 있어 그것이 거름이 되고 씨앗이 되어 좋은 열매라는 훌륭한 자료를 받고 있다.

  

  표본가구에서 본인이 국가통계를 위하여 이 한 몸 희생하며, 최선을 다해 꼼꼼하게 가계부를 잘 써주는 사람만 표본 가구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열심히 쓰지 않는 사람. 아예 안 쓰겠다고 드러눕는 사람. 열심히 쓰는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구멍이 숭숭 나 있는 가계부 등.

 

 아마도 가계조사를 하고 있는 조사원들이라면 이런 사람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것이다. 그리고 나의 두 가지 사례를 통해서 본 것처럼, 스마트 폰을 이용하는 것이 이들에게 좀 더 쉽게 아니 좀 더 부드럽게 접근 할 수 있는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컴퓨터를 켜지 않아도 휴대폰만으로 언제 어디서든 물리적인 거리를 벗어나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있고, 관심만 있다면 쉽게 친구가 되어 그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고, 래포가 형성되니 저절로 질 좋은 통계생산의 밑거름이 되는 세상~~


 내 손 안에 작은 휴대폰에는 나만의 현장 조사 이야기가 있고, 함께 마음을 나누는 응답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안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연결되어서, 또 다른 통계조사 자료만이 아닌, 뭔가 뭉클하고 몽글한 것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로인하여 조금은 구멍이 나 있었던 몇 몇 가구들의 가계부가 변하고 있다. 스마트한 세상을 만나고, 살면서 나의 가계부 또한 스마트하게 변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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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빙 바람이 부는 요즘은 건강관리를 도와주는 ‘다이어트 프로그래머’나 ‘운동처방사’ 같은 이색 직업이 뜨고 있지만 60년 전 광복 직후만 해도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ㆍ임업ㆍ수산업 등 1차 산업에 종사해서 직업이라는 개념마저 생소했다.

1963년 직업별 취업자 비율을 보면 농림어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비중은 62.9%에 달했던 반면 사무직 종사자는 3.5%, 전문ㆍ기술관련 종사자는 3.3%에 불과했다. 40년이 지난 2007년에는 농림어업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6.9%로 하락한 반면, 사무직 종사자와 전문ㆍ기술관련 종사자는 각각 14.1%, 19.8%로 상승하였다.

한국고용정보원의 '한국직업사전'에 오른 직업 명칭의 수도 1969년 3,260개에서 2003년 1만 2,306개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해방 후 60여 년 동안 우리나라를 풍미했던 '유망' 직업은 어떻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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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미 군정(軍政) 시절에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타이피스트가 인기 직종이었다. 자원과 물자가 부족하여 고물을 사들이는 고물상과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일확천금을 노리는 광산개발업자도 주목을 받았었다.


초ㆍ중ㆍ고교 교사는 제때 현금으로 보수를 받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자 존경받는 직업인으로 선망을 받았다. 1950년대는 전차ㆍ전화ㆍ라디오 등 새로운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전차 운전사ㆍ전화교환원ㆍ라디오 조립원ㆍ공장노동자(고무ㆍ가발ㆍ섬유) 등이 유망 직종으로 떠올랐다. 또 나라의 기반이 잡히면서 군인ㆍ경찰도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는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산업화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노동인력이 대거 도시로 유입되면서 다양한 직종이 생겨났다. 이 시절에는 엔지니어나 섬유ㆍ합판ㆍ신발 분야의 기능공이 각광받았고 섬유ㆍ가발 공장의 여공(女工)은 서민층 여성의 대표적인 직업이 됐다. 화이트칼라의 인기도 이때부터 시작되어 사무직을 선호하는 엘리트들이 은행에 몰렸다. 은행원은 당시 손꼽히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1970년대는 사회경제구조가 대기업 중심으로 변모하면서 대기업 직원이 선호 직업 1위로 부상했다. 특히, 종합상사맨은 해외 주재원으로 나갈 수 있고 월급도 많아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승무원은 여성의 인기 직종이었다.

1980년대 들어 삶의 여유가 생기자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에게 젊은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증권ㆍ금융업이 성장하면서 펀드매니저ㆍ외환딜러 등이 선호 직종으로 부상했고 반도체ㆍ컴퓨터ㆍ광고 분야에서도 일자리가 만들어졌다. 반면 출퇴근 시민들의 길동무였던 버스 안내원, 몇 집 건너 하나 꼴로 있던 전당포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서울에만 7,000여 개에 이르던 주산학원도 문을 닫거나 속셈ㆍ보습학원 등으로 속속 간판을 바꿨다.

1990년대에는 IT가 발달하면서 프로그래머ㆍ벤처기업가 등이 각광을 받았다. 인터넷과 컴퓨터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웹마스터ㆍ프로그래머가 젊은이들 사이 인기직종이 됐다.

2000년대는 그야말로 직업 혁명의 시대로 이색 직업군이 생겨났다 또 금방 사라지곤 한다. 손님처럼 매장을 방문해 직원들의 서비스 수준을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퍼’나 인터넷 학습사이트 교사인 ‘사이처’(Cyber와 Teacher의 합성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게임으로 소일해 부모 속을 썩이던 소년은 ‘프로게이머’가 되어, 강아지를 좋아하던 소녀는 애완견 미용사가 되어 돈을 벌고 있다. 2000년대는 분야별로는 정보통신과 생명공학, 환경ㆍ에너지 산업 및 실버산업에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있다.

「통계로 본 대한민국 60년의 경제·사회상 변화」보도자료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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