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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10]





조선후기 통계세법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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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조선후기 중흥기를 이끈 임금, 영조' / ☜ 클릭 시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변화를 맞이하고, 기존 체제의 모순이 축적되면서 백성의 생활도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는데요, 그래서 실제로 정책을 실행한 적도 있고, 의견에만 그친 적도 있지만 결국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호구조사를 바탕으로 균역법을 실시한 영조

 조선시대 군역은 처음부터 16세부터 60세까지의 양인에게 부과하고, 이를 정군(正軍)과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보인이 정군을 경제적으로 보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 이후 모병제를 실시하면서 군역은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어 군역으로서의 군포는 국가재정에 큰 비중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 중 하나인 군정의 문란으로 힘 있는 계층은 군포부과에서 빠져나가고, 힘없는 백성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다양하게 제시되었죠.

숙종 때에는 군포징수를 인정(人丁)단위가 아닌 가호(家戶)단위로 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받자는 호포론(戶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토지에 부가세를 부과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자는 결포론(結布論), 유한양정(有閑良丁)을 적발하고 양반가 자제 및 유생(儒生)에게도 징포하자는 유포론(游布論:儒布論), 군포를 폐지하고 대신 돈으로 받자는 구전론(口錢論), 아예 군의 규모를 축소하여 군사비 자체를 줄이자는 등의 여럿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이 중 유력한 것은 호포제와 가호단위로 군포 대신 돈을 받는 호전제(戶錢制)였습니다. 일단 호구 통계를 바로 잡고, 이를 바탕으로 군포 문제를 해결하자는 의견들이었지만, 기득권층인 양반층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현 될 수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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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42년, 영조는 군포 문제 해결에 보다 박차를 가하여 양역사정청(良役査正廳)을 설치, 양역에 대해 실태를 파악하고, 양인의 호구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743년에는 이 조사를 바탕으로 영의정 조현명에게 양역실총(良役實摠)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1748년엔 이 작업이 완료되어 전국의 양정수와 군포필수를 조사 수록한 양역실총이 완성됩니다. 이를 통해 군포를 감필할 경우의 부족한 군포수를 알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대책은 결포론과 호포론으로 여전히 대신 간의 의견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백성의 의견을 직접 들어보고자 나서게 되죠..

1750년 5월, 영조는 창경궁(昌慶宮)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 직접 나가서 신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게까지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기서 호전이 편하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양반층의 반대가 심해 시행하긴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영조는 그 해 7월, 다시 한 번 백성과 유생들의 의견을 듣고 군포 문제에 대하여 정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조는 반대를 무릅쓰고 균역청을 설치하여 군포 2필을 1필로 감필한다는 선포를 하고, 줄어든 군포 수만큼 대체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렇게 하여 실시한 것이 균역볍입니다. 균역법으로 군포 징수를 1필로 줄인 대신, 어전세(漁箭稅)·염세(鹽稅)·선세(船稅) 등을 균역청에서 관장하여 보충하였습니다.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가구와 인구 통계를 먼저 내고, 이를 바탕으로 정책 수립 방향을 대신들과 토론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듣는, 왕조시대엔 생각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민의를 반영하여 새로운 정책 균역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이전에 소개해드린 세종대왕이 공법 시행을 위해 17만 명의 의견을 통계조사로 알아본 이후 왕이 적극적으로 통계를 활용하고, 애민정신을 담아 백성의 의견을 담아 정책을 시행한 사례일 것 입니다.^^

통계 누락과 정확한 통계를 강조한 정약용

균역법으로 군포 1필이 감해진 것은 백성의 부담을 줄인 개혁이었지만, 군포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진 못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영조나 그의 손자 정조는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실행했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르진 못하였으며,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이루어지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됨에 따라 삼정의 문란 또한 더 심각해지고, 조선의 국력도 약해지게 되죠.

이렇게 조선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개혁을 하지 못한 것에는 기본적으로 기득권층의 개혁에 대한 저항과, 이 저항을 극복할 추진력이 부족한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개혁을 방해하는 요소를 살펴본다면, 통계 문제 역시 들 수 있는데요, 조선 후기 인구는 기록상으로 약 700만 명으로 집계되지만, 1788년에 발간된 탁지지(度支志)에서는 가구가 14.9%, 인구는 26.7%가 누락되어 실제 인구는 1천만명 일 것이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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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소개해드린 다산 정약용의 토지 통계, 기억하시나요?

조선의 엄친아,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정확한 호구 파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는 관할 고을의 실제 가구를 조사하여 이를 근거로 백성의 생활을 파악해서 가좌지부(오늘날의 주민등록부에 해당)를 만들고, 아울러 경위표(오늘날의 통계표에 해당)를 작성하여 지방 행정에 활용토록 주장한 것이죠. 이렇게 지방 통계들이 정확히 작성되어 모이면 국가 전체 통계가 튼실해졌겠죠?

정약용은 정확한 통계를 위해 조사를 하는 아전들의 정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조사한 통계를 지도로 활용해 이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주장은 당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 <목민심서>에서도 보여지죠. <목민심서>는 오늘날까지 지방관의 마음가짐을 담은 책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지만 정작 조선에서는 실제 정책에 활용되진 못하였습니다.



영조의 애민정신, 정약용의 개혁정신 모두 통계를 잘 활용하는 것이 필요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21세기, 통계청은 정부행정에서 국민 생활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정확한 통계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구조사를 하는 아전의 정성이 중요하다는 정약용의 지적처럼, 오늘날 현장에서 조사하는 통계조사원도 통계교육원 등을 통한 교육으로 수준 높은 조사를 이루어지게 하고, 이렇게 모은 자료로 통계를 공개하여 다방면에 활용되고 있죠.

부정확한 통계가 나라의 혼란에 일조했던 옛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통계청의 정확한 노력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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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9]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학자, 정약용토지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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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오픈캐스트 /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 클릭시 링크로 이동됩니다.>



올해는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포> 등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가 연구한 분야를 보면 유학을 비롯하여 정치와 지방행정, 경제, 법학, 의학, 언어학, 과학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수많은 학문을 섭렵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거중기를 만듦으로써 이공계의 재능까지 보였으니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천재이자 엄친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약용의 학문체계를 오늘날에는 다산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 개인과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터져 나오던 조선 후기, 정약용은 혼란한 나라를 위한 사회 개혁안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엔 통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지요. 정약용의 통계 이야기, 함께 보실까요?



정약용의 토지개혁안, 정전론

조선은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나라였습니다. 조선 후기는 지주와 그 밑의 소작농이 있는 지주 전호제 였는데, 나라에서 세법 개혁을 하더라도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부담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백성 생활의 피폐로 이어졌으니, 조선 후기 사회문제 해결 방안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토지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학문이 없는 엄친아 정약용도 당연히 토지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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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약용이 처음에 제시한 것이 여전론(閭田論)이었습니다. 여전론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즉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한 마을을 1려(閭)를 단위로 한 토지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면서 공동 경작과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지주 전호제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것인데요, 공산주의의 농낭(農糧)운영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무 이상적이라 정약용 스스로도 실현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의 저서 <경세유표>에서 다시 토지개혁안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정전제(井田制)입니다.

정전제는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 제도로 중국 고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서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중국에서는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정전제를 다시 시행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채택되진 못 했다고 하네요.

조선에서도 지주 전호제의 확대 이후 주장되었는데, 정약용 역시 토지개혁방안으로 여전론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 정전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정전제에 반대하는 주장은 중국과 조선의 토지와 인구 규모의 차이를 들었습니다. 또한 산지가 많은 한반도에서는 우물 정으로 토지를 나누기도 어려운데요, 하지만 정약용은 정전제는 실행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통계 조사의 필요성이 포함되어 있었죠.

정약용은 농민에게만 경작권을 주면서 가족 중에서 노동에 가담할 수 있는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사람이 5명 이상일 경우에는 1결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하고, 4인 이하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1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경작하도록 주장했습니다. 만일 실행 시에는 농민과 농민이 아닌 자, 그리고 농민의 가족사항과 토지 경작능력을 기준으로 경작권을 주므로 상세한 호구조사가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정약용의 계산으로는 4촌을 묶어서 이(里)로, 4리를 묶어서 방(坊)으로, 4방을 묶어 부(部)로 만들면, 농사 하지 않는 호(戶)를 통계하면 4부 백성이 3천여 호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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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당시에 세금을 피하는 유랑민이 많았는데, 정약용은 세금을 영구히 면제하는 관전(官田)을 만들고, 군사에게 경작하는 둔전으로 활용해 국방과 토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법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둔전제 자체는 동양에서 고대부터 활용된 방법으로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도 둔전을 두었는데요, 정약용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여기에 통계 활용을 더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과거 토지, 호구 등의 통계를 정리한 문서를 장적(帳籍)이라 하는데, 정약용은 매년 동지에 관찰사가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경작하는 관전에 대한 통계인 신기전장적(新起田帳籍)을 거두어서 경전사(經田司)에 보고하면, 경전사에서는 8도 신기전 장적을 통계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한 다음 9등급으로 분간하고, 위로 3등급은 상을 내리고, 아래로 3등급은 벌을 내려 토지의 질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정약용은 곡식 소출에 대한 통계 등을 제시하면서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는데요, 하지만 당시의 기득권층인 지주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부족하였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토지 개혁 방향을 제사하였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런 토지 개혁은 조선에선 실행되지 못하여 지주 전호제가 유지되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소작농이 지주 밑에서 농사를 하는 체제는 이어지다가, 해방 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 체제가 붕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 121조 1항에서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시하여 정약용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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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뛰어난 식견을 가졌지만, 우리는 그 식견을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로 알 수 있다는 건 끝내 그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정약용의 생각이 궁정에 반영될 수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우리가 현재 아는 것과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우리 역사 상 가장 존경받는 학자 중의 1명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이시간에는 한국사 통계 마지막 이야기, '조선후기 호구조사와 세법 개혁'에 대한 재밌는 통계 역사 알려드릴께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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