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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7]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토지 통계, 광무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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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조선의 26대 왕,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다' / ☜ 클릭 시 해당 페이지로 이동됩니다>

 

1987년 10월 12일, 고종은 조선을 새롭게 하여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정합니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는데요, 고종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연호를 '광무'로 정하였기에 이 개혁도 '광무개혁'이라고 부릅니다.

광무개혁 내용 중에는 토지 통계를 다시 내는 양전(量田)사업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이 역시 연호를 따서 '광무양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토지 통계라 할 수 있는 광무양전, 과연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광무양전의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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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병폐가 진주민란으로 터진 이후 양전 사업에 대한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고종 즉위 후 섭정을 한 흥선 대원군에 의하여 어느 정도 개혁이 진행되었지만, 양전 사업까지는 진행을 못하였고, 이후로도 개항과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등의 대사건이 이어지고, 조선 정부도 혼란해지면서 양전사업을 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직전인 1898년 6월 23일, 내부대신 박정양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의 연명으로 '토지측량에 관한 청의서'를 의정부에 제출하면서 양전사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됩니다. 그래서 7월 2일 양전담당기관으로서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고, 관련 칙령이 반포되면서 토지소유관계 파악과 지세수입 증대를 위한 양전사업이 진행됩니다.

 양전사업은 측량 조사와 양안제작의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측량은 양무위원과 학원이 한 조를 이루어 진행하고, 지역 실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조하게 하였습니다. 측량은 양전척(1척은 약 1m)으로써 실측하여 하루에 120필지 내외를 측량하였고, 양안 제작은 3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1단계로 측량 및 조사 내용을 '야초(野草)'로 작성하고, 2단계는 지방 관아에서 면별로 작성된 '야초책'을 면의 순서에 따라 자호와 지번을 부야하면서 면적·결부·시주·시작·사표 등의 정확성 여부를 확인하여 '중초책(中草冊)'을 작성하였으며, 3단계로 양지아문에서 이를 수합한 다음 게재형식을 통일하여 '정서책(正書冊)'을 작성하는 방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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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원구단>

 

1899년 충남 아산을 시작으로 실시한 양전사업은 1901년 12월 중단될 때 까지 2년간 경기도 1부 14군, 충북 17군, 충남 22군, 전북 14군, 전남 16군, 경북 27군, 경남 10군, 황해 3군 등 합계 1부 123군에서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1901년 10월 20일 설립된 지계아문(地契衙門)에 의해 1902년 3월부터 양전사업이 재개됩니다. '지계'는 토지 소유권 증명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토지 소유 문제를 정리하면서 양전사업의 권한까지 인계 받은 것입니다. 지계아문은 경기 7군, 충남 16군, 전북 12군, 경북 14군, 경남 1부 20군, 강원도 26군 전체, 합계 1부 95군에서 양전사업을 진행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으로 중단하고,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일제의 사실상 속국이 되면서 재개되진 못하였습니다.



광무양전의 의의와 한계

광무양전은 근대적 실측법을 도입하고, 조선시대의 토지 소유권을 근대적 소유권으로 이행하였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계 역시 컸는데요, 광무양전의 중단은 러일전쟁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도 한계점을 가져 성공을 장담하긴 어려웠습니다.

우선 광무양전이 근대적 측량기술을 도입하려 했지만, 아직 근대기술에 익숙치 않은 대한제국으로서는 토지측량기술이 불완전한 면이 컸습니다. 그리고 토지 소유권은 기존의 문서인 양안을 기초로 하였는데, 양안 자체가 이미 조선 후기 혼란 속에서 불완전한 부분이 많았기에, 이를 토대로 한 토지소유도 제대로 밝힐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양안의 혼란과 지금의 토지소유와는 개념이 다른 조선시대의 관념으로 서류상으로는 국유지지만 실질적으로는 사유지도 적지 않았는데, 양민을 기준으로 하면서 이런 토지는 모두 국유지로 편입하여 토지 분쟁도 적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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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태극기>

 

그리고 근대적 토지제도를 위해 실시한 광무양전이지만, 정작 대한제국 자체는 봉건성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보면 2조가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부터 오백년간 전래하시고 이후부터는 항만세(恒萬歲) 불변하오실 전체 정치이니라'라 규정하고, 이 외 조항도 황제의 권한을 강력히 명시하여 근대적 입헌군주제와는 거리가 먼 전제정치를 법으로 규정할 정도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왕권이 사간원을 비롯한 삼사의 견제를 받던 조선보다 더 전제적이기도 했습니다.

광무개혁도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근대사업도 왕실 주도로 이루어지는 면이 컸기에, 근대 문물이 도입되었음에도 실질적인 의도는 전제 권력 강화라는 복고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광무양전, 그리고 이와 함께 진행된 지계사업 역시 광무개혁의 일부로 정권의 봉건을 극복하지 못하였기에 토지소유관계의 파악과 지세수입의 확보라는 목적 달성도 실패하였습니다. 근대적 토지조사는 꼭 필요했지만, 정작 당시 정권이 전제왕권 강화와 봉건성을 극복하지 못하여 진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러일전쟁과 일제의 침략에 직면하면서 실패하였고, 이는 양전사업 이외의 광무개혁도 마찬가지의 결과를 낳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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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4]



대왕이라 쓰고 세종이라 읽는다

세종시대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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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세종대왕' / 사진을 누르면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이틀 전인 지난 10월 9일, 대한민국은 566번째 한글날을 맞이하였습니다.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와중에 모두가 함께 한글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뜻깊은 날인데요, 이에 맞춰 오늘의 역사 속 통계 이야기는 세종시대의 호구조사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조선 초기 태종의 호구조사는 지난 주에 소개해드렸죠? 호구조사를 비롯한 태종시대에 쌓은 업적을 기반으로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물론 세종의 통치는 단순히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만 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세종은 전 분야에 걸쳐 더 발전된 업적을 남겨서 대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양의 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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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을 더 잘 다스리기 위한 여러 방책을 실시한 세종에게 아버지 태종 때 실시한 호구조사는 여전히 국정의 기본 자료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태종시대에 대대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지금처럼 사회변동이 활발한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출생과 사망에 따른 인구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어서 새로운 호주조사가 필요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5년이나 10년 주기로 인구센서스를 실시하여 인구 변화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리고 태종시대의 호구조사로 지방의 호구는 파악하고 있는데, 정작 한양에서는 호구조사가 미진하였다고 합니다. 지방 주군은 호적 정리가 되어 있어서 부역을 부과할 때 기준을 정하기 좋았지만, 정작 한성 일대 10리는 정리가 되지 않아 부역을 시키기 어렵다는 한성부(漢城府 - 지금의 서울시청)의 보고는 당시 사정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보고에 근거하여 세종시대에는 한성에서의 호구조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한성호구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집안 가계도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백성들이 바치는 사조단자(四祖單子 -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본관, 성명, 생년월일, 관직 등을 적은 단자)를 사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으니까요.

조선시대 양반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건 조상의 출사나 과거 급제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빈틈을 노려 가문의 위계를 높이려한 시도가 있었고, 한성부에선 이를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양인과 천민의 구분도 허위로 기재하여 뒷날 분쟁이 벌어질 우려도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습니다.

그 외에 조선시대에도 위장전입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녀를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나 부동산 매매, 세금등의 이유로 위장전입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백성이 힘든 부역을 피해 한결 편한 한양으로 거짓으로 편입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위장전입자가 늘어나면 제대로 된 호구 통계를 낼 수 없겠죠? 그래서 호구조사 결과 집이 없는 자 중 이전의 호구조사 명단에 없는 사람을 비교해서 실제로 한양에 사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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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방으로 발령받은 관리 중 집은 서울에 있는 사람은 호구로 올릴 수 있도록 각 도의 감사에게 지시하여 정확한 통계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 출신이라도 지방으로 발령되면 주민등록을 많이 옮기지만, 당시는 가구 이동을 하지 않는 시대인 만큼 지방으로 발령받은 관리도 서울에 집과 가족이 있으면 서울의 호구에 올렸던 것이죠.

이에 더하여 1428년(세종 10년)에는 궁궐에 사는 왕자나 왕족도 호구대장에 기록하여 기록의 정확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이런 조사 결과는 <세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1435년(세종 17)의 한양 호구는 성(城) 안의 호구가 1만9천5백52이고, 성(城) 밖 10리의 호구가 2천3백39이었습니다. 물론 기록으로 전하지 않을 뿐이지만 1435년 이전에도 이미 한양의 호구는 정리가 되었고, 지방의 호구조사 역시 꾸준히 갱신되어 발전이 되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세종대왕' / 사진을 누르면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호구조사의 활용

그렇다면 세종시대에 호구조사 결과는 어떻게 이용되었을까요? 세종시대의 통계 활용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세종대왕은 당시의 새로운 세법인 공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17만명에 이르는 백성의 의견을 들었고

(세종대왕, 통계로 정책을 세우다 ☜ 클릭 시 해당 글로 이동),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통계를 활용하였음

(세종대왕, 통계로 백성의 농사를 도운 애민군주 ☜ 클릭 시 해당 글로 이동) 기억하실런지요?^^



세종대왕은 특히 공법 시행을 위하여 백성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는 호구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조사대상을 선정하고 실행하였는데, 이를 보면 아버지 태종 때 시작하여 다듬은 호구조사가 국정에 유용한 자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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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4둔 6진 개척에도 호구조사가 중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최윤덕과 김종서가 북방 여진족을 정벌하고 조선의 통치권을 다지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오늘날의 영토가 확립되었다는 건 모두 잘 아는 상식이죠? 새로이 개척한 영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영구히 거주할 백성이 필요하고, 이 지역에 대한 사민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은 국경선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4군 6진으로 이주하는 백성,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의 파악에 있어서도 호구조사는 중요한 자료였고, 이를 위해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호적 정리계획을 의논하고 보고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종시대 많은 업적 중에 통계를 바탕으로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죠.



다만 계속되는 호구조사에도 불구하고 조사에 잡히지 않는 통계고 있어 백성의 정확한 숫자를 알기 어렵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규정을 정비하면서, 이 후 성종시대에 이르러 편찬된 <경국대전>에서는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법이 들어가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군, 대왕이라 쓰고 세종대왕이라 읽는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세종대왕 시대의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편에는 지리지와 지도 속 조선의 통계가 연재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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