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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9]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학자, 정약용토지개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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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오픈캐스트 / 실학을 집대성하여 부국강병의 꿈을 꾸다 ☜ 클릭시 링크로 이동됩니다.>



올해는 다산 정약용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포> 등의 다양한 저서를 남겼습니다. 그가 연구한 분야를 보면 유학을 비롯하여 정치와 지방행정, 경제, 법학, 의학, 언어학, 과학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넘나드는 수많은 학문을 섭렵하고, 수원 화성을 건축할 때 거중기를 만듦으로써 이공계의 재능까지 보였으니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천재이자 엄친아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정약용의 학문체계를 오늘날에는 다산학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한 개인과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문이 발표된 인물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터져 나오던 조선 후기, 정약용은 혼란한 나라를 위한 사회 개혁안도 많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엔 통계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었지요. 정약용의 통계 이야기, 함께 보실까요?



정약용의 토지개혁안, 정전론

조선은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나라였습니다. 조선 후기는 지주와 그 밑의 소작농이 있는 지주 전호제 였는데, 나라에서 세법 개혁을 하더라도 지주들이 소작농에게 부담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백성 생활의 피폐로 이어졌으니, 조선 후기 사회문제 해결 방안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토지개혁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학문이 없는 엄친아 정약용도 당연히 토지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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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약용이 처음에 제시한 것이 여전론(閭田論)이었습니다. 여전론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 즉 농사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소유하고, 토지의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한 마을을 1려(閭)를 단위로 한 토지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면서 공동 경작과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당시의 지주 전호제를 전면적으로 뒤엎는 것인데요, 공산주의의 농낭(農糧)운영과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너무 이상적이라 정약용 스스로도 실현 가능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의 저서 <경세유표>에서 다시 토지개혁안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정전제(井田制)입니다.

정전제는 토지의 한 구역을 '정(井)'자로 9등분하여 8호의 농가가 각각 한 구역씩 경작하고, 가운데 있는 한 구역은 8호가 공동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물을 국가에 조세로 바치는 토지 제도로 중국 고대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서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중국에서는 당나라, 송나라 시대에 정전제를 다시 시행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채택되진 못 했다고 하네요.

조선에서도 지주 전호제의 확대 이후 주장되었는데, 정약용 역시 토지개혁방안으로 여전론보다 현실적인 방안으로 정전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정전제에 반대하는 주장은 중국과 조선의 토지와 인구 규모의 차이를 들었습니다. 또한 산지가 많은 한반도에서는 우물 정으로 토지를 나누기도 어려운데요, 하지만 정약용은 정전제는 실행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전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통계 조사의 필요성이 포함되어 있었죠.

정약용은 농민에게만 경작권을 주면서 가족 중에서 노동에 가담할 수 있는 20세 이상 60세 이하의 사람이 5명 이상일 경우에는 1결의 토지를 경작하도록 하고, 4인 이하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1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토지를 경작하도록 주장했습니다. 만일 실행 시에는 농민과 농민이 아닌 자, 그리고 농민의 가족사항과 토지 경작능력을 기준으로 경작권을 주므로 상세한 호구조사가 필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정약용의 계산으로는 4촌을 묶어서 이(里)로, 4리를 묶어서 방(坊)으로, 4방을 묶어 부(部)로 만들면, 농사 하지 않는 호(戶)를 통계하면 4부 백성이 3천여 호에 가깝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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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당시에 세금을 피하는 유랑민이 많았는데, 정약용은 세금을 영구히 면제하는 관전(官田)을 만들고, 군사에게 경작하는 둔전으로 활용해 국방과 토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법도 제시하였습니다. 이런 둔전제 자체는 동양에서 고대부터 활용된 방법으로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도 둔전을 두었는데요, 정약용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여기에 통계 활용을 더하는 것을 주장합니다. 과거 토지, 호구 등의 통계를 정리한 문서를 장적(帳籍)이라 하는데, 정약용은 매년 동지에 관찰사가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경작하는 관전에 대한 통계인 신기전장적(新起田帳籍)을 거두어서 경전사(經田司)에 보고하면, 경전사에서는 8도 신기전 장적을 통계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한 다음 9등급으로 분간하고, 위로 3등급은 상을 내리고, 아래로 3등급은 벌을 내려 토지의 질을 높이도록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밖에도 정약용은 곡식 소출에 대한 통계 등을 제시하면서 토지개혁을 주장하였는데요, 하지만 당시의 기득권층인 지주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부족하였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토지 개혁 방향을 제사하였다는 점에선 의의가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런 토지 개혁은 조선에선 실행되지 못하여 지주 전호제가 유지되고,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소작농이 지주 밑에서 농사를 하는 체제는 이어지다가, 해방 후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이 체제가 붕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은 121조 1항에서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시하여 정약용의 이상이 비로소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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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뛰어난 식견을 가졌지만, 우리는 그 식견을 그가 유배지에서 남긴 저서로 알 수 있다는 건 끝내 그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정약용의 생각이 궁정에 반영될 수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역사는 우리가 현재 아는 것과 많이 달라질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네요.

우리 역사 상 가장 존경받는 학자 중의 1명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이시간에는 한국사 통계 마지막 이야기, '조선후기 호구조사와 세법 개혁'에 대한 재밌는 통계 역사 알려드릴께요~^^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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