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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4]



대왕이라 쓰고 세종이라 읽는다

세종시대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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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캐스트 '세종대왕' / 사진을 누르면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이틀 전인 지난 10월 9일, 대한민국은 566번째 한글날을 맞이하였습니다.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는 와중에 모두가 함께 한글을 아끼고 소중하게 여겼던 뜻깊은 날인데요, 이에 맞춰 오늘의 역사 속 통계 이야기는 세종시대의 호구조사를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조선 초기 태종의 호구조사는 지난 주에 소개해드렸죠? 호구조사를 비롯한 태종시대에 쌓은 업적을 기반으로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물론 세종의 통치는 단순히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기만 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세종은 전 분야에 걸쳐 더 발전된 업적을 남겨서 대왕이라는 칭호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양의 호구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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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을 더 잘 다스리기 위한 여러 방책을 실시한 세종에게 아버지 태종 때 실시한 호구조사는 여전히 국정의 기본 자료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태종시대에 대대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했지만 지금처럼 사회변동이 활발한 시대는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출생과 사망에 따른 인구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어서 새로운 호주조사가 필요해지기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5년이나 10년 주기로 인구센서스를 실시하여 인구 변화를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그리고 태종시대의 호구조사로 지방의 호구는 파악하고 있는데, 정작 한양에서는 호구조사가 미진하였다고 합니다. 지방 주군은 호적 정리가 되어 있어서 부역을 부과할 때 기준을 정하기 좋았지만, 정작 한성 일대 10리는 정리가 되지 않아 부역을 시키기 어렵다는 한성부(漢城府 - 지금의 서울시청)의 보고는 당시 사정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런 보고에 근거하여 세종시대에는 한성에서의 호구조사가 진행됩니다. 그런데 한성호구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집안 가계도를 조작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백성들이 바치는 사조단자(四祖單子 - 아버지·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본관, 성명, 생년월일, 관직 등을 적은 단자)를 사실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건의가 올라오기도 했으니까요.

조선시대 양반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건 조상의 출사나 과거 급제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빈틈을 노려 가문의 위계를 높이려한 시도가 있었고, 한성부에선 이를 지적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양인과 천민의 구분도 허위로 기재하여 뒷날 분쟁이 벌어질 우려도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습니다.

그 외에 조선시대에도 위장전입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녀를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서나 부동산 매매, 세금등의 이유로 위장전입을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백성이 힘든 부역을 피해 한결 편한 한양으로 거짓으로 편입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위장전입자가 늘어나면 제대로 된 호구 통계를 낼 수 없겠죠? 그래서 호구조사 결과 집이 없는 자 중 이전의 호구조사 명단에 없는 사람을 비교해서 실제로 한양에 사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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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지방으로 발령받은 관리 중 집은 서울에 있는 사람은 호구로 올릴 수 있도록 각 도의 감사에게 지시하여 정확한 통계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서울 출신이라도 지방으로 발령되면 주민등록을 많이 옮기지만, 당시는 가구 이동을 하지 않는 시대인 만큼 지방으로 발령받은 관리도 서울에 집과 가족이 있으면 서울의 호구에 올렸던 것이죠.

이에 더하여 1428년(세종 10년)에는 궁궐에 사는 왕자나 왕족도 호구대장에 기록하여 기록의 정확성을 높였다고 합니다. 이런 조사 결과는 <세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1435년(세종 17)의 한양 호구는 성(城) 안의 호구가 1만9천5백52이고, 성(城) 밖 10리의 호구가 2천3백39이었습니다. 물론 기록으로 전하지 않을 뿐이지만 1435년 이전에도 이미 한양의 호구는 정리가 되었고, 지방의 호구조사 역시 꾸준히 갱신되어 발전이 되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캐스트 '세종대왕' / 사진을 누르면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호구조사의 활용

그렇다면 세종시대에 호구조사 결과는 어떻게 이용되었을까요? 세종시대의 통계 활용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해드린 적이 있는데요, 세종대왕은 당시의 새로운 세법인 공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17만명에 이르는 백성의 의견을 들었고

(세종대왕, 통계로 정책을 세우다 ☜ 클릭 시 해당 글로 이동), 농사직설 등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통계를 활용하였음

(세종대왕, 통계로 백성의 농사를 도운 애민군주 ☜ 클릭 시 해당 글로 이동) 기억하실런지요?^^



세종대왕은 특히 공법 시행을 위하여 백성의 의견을 듣는 과정에서는 호구조사 자료를 기반으로 조사대상을 선정하고 실행하였는데, 이를 보면 아버지 태종 때 시작하여 다듬은 호구조사가 국정에 유용한 자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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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대 4둔 6진 개척에도 호구조사가 중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최윤덕과 김종서가 북방 여진족을 정벌하고 조선의 통치권을 다지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오늘날의 영토가 확립되었다는 건 모두 잘 아는 상식이죠? 새로이 개척한 영토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영구히 거주할 백성이 필요하고, 이 지역에 대한 사민정책을 실시함으로써 조선은 국경선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4군 6진으로 이주하는 백성, 그리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백성의 파악에 있어서도 호구조사는 중요한 자료였고, 이를 위해 세종대왕은 김종서에게 호적 정리계획을 의논하고 보고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렇게 세종시대 많은 업적 중에 통계를 바탕으로 남긴 업적이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죠.



다만 계속되는 호구조사에도 불구하고 조사에 잡히지 않는 통계고 있어 백성의 정확한 숫자를 알기 어렵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만, 세종시대를 거치면서 규정을 정비하면서, 이 후 성종시대에 이르러 편찬된 <경국대전>에서는 3년마다 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법이 들어가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군, 대왕이라 쓰고 세종대왕이라 읽는 우리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왕, 세종대왕 시대의 통계 이야기, 어떠셨나요?

다음 편에는 지리지와 지도 속 조선의 통계가 연재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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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무수한 업적이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지난 번 소식 기억하시죠? (지난 포스팅 보기) 6월 5일(음:4월 16일)곡식의 씨를 뿌린다는 망종(亡種)이었습니다. 망종 전후는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하느라 바쁜 시기인데요. 세종대왕은 농사직설을 편찬해 농민들이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업의 과학화를 만든 위대한 군주이기도 해요. 농업은 지금도 중요한 산업이지만, 제조업이 미약했던 조선시대에는 국가 산업의 전부였습니다. 농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었죠. ‘農者天下之本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고요.




위대한 군주 세종은 재위기간 측우기를 개발하고, ‘농사직설을 편찬했습니다. 이것 역시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여러분도 눈치 채셨죠? 이번에는 통계의 힘으로 애민(愛民)을 실천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할께요.



 

농업의 통계를 집대성하다! <농사직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세종대왕이 정초(鄭招) 등에게 명해 1429(세종 11)에 편찬한 농서입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농서를 사용해 농사를 지었는데요. 중국과 조선의 기후 및 환경 차이로 오류가 많았죠. 그래서 세종은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김홍도 풍속화 논갈이

 


<농사직설>은 먼저 일반론으로서 종자와 토양을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루는 작물이 곡식류에 국한되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과일 재배가 흔치 않고, 곡물 재배가 농업의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역시 대단한 정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농사직설>이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여러 역사적 기록에서 전하고 있어요.



“(전략)오방(五方)의 풍토(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適性)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들을 방문(訪問)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또 신() ()와 변효문(卞孝文)과 더불어 피열(披閱) 참고(參考)하여 그 중복(重複)된 것을 버리고 그 절요(切要)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였다. 농사 외에는 다른 설()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山野)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하략)”

<세종실록> 1429(세종 11) 516

 

 

<농사직설>은 학자들이 책상 위에서 만들어 낸 책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농업 전문가(각 지방에서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경험이 풍부한 농민)에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고, 어떤 방법이 안 좋은 지를 모아, 이를 가리고, 수렴해 중복되는 점은 빼고, 중요한 점만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죠. 오늘날 통계 조사 방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 <농사직설>은 조선의 농업전문가의 경험과 지식의 통계를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게 편찬한 농서였던 것이죠. <농사직설>은 한글이 창제된 후에는 일반 농민도 읽을 수 있게 한글로 번역돼 보급되었답니다. <농사직설>의 보급은 농업의 과학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하게 돼요.

 

 

 

조선의 강우량을 통계하다, <측우기>

 

 

농사를 결정짓는 것은 날씨입니다. 특히 비는 농사의 성패에 결정적 요소입니다. 가뭄과 홍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농작물의 피해를 줄여 농업생산력 증대에 효과를 볼 수 있죠.

 

 

하지만 비를 내리고, 그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입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비를 마음대로 내리게 할 순 없지만, ‘비가 내리는 양을 알고 조사할 순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물건, 측우기를 발명하게 됩니다. 측우기는 일반적으로 세종의 신하였던 장영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세종의 세자였던 문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는 학설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고요.


 

 

“(전략)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하략)”

<세종실록> 1441(세종 23) 429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진품인 금영 측우기

 

 

 

측우기 발명은 조선에 획기적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세종대왕은 측우기 발명 이후 8도에 측우기를 보내, 지역의 강수량, 비가 내리고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는데요. 이런 식으로 전국 강우량을 측정하고, 비와 관련한 통계를 축적하니 지역별로 비가 많이 오거나 적게 내리는 시기, 비가 충분히 내릴 때와 적게 내릴 때를 예상해 농업에 적용할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가능해 졌지요.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 측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영조시대를 거치며 다시 시행되는데, 정조 때 이르면 전년도 동월의 강수량과 올해 강수량을 비교할 정도로 통계를 모은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농사직설>이 농업 통계를 모은 결과물로 백성을 도운 것이라면 측우기는 백성을 돕기 위한 통계를 보다 정확하게 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었던 것이죠.

 

우리 역사상 최고 군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데는 그의 애민정신은 물론, 백성을 위해 통계와 같은 효율적 방법을 활용해 빛나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일 겁니다. 통계의 힘을 적절히 활용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것은 오늘날에도 본받을 수 있는 통치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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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는 세종대왕, 그의 무수한 업적이 통계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여러분은 아시나요? 통계가 없던 시절, 과학적 통계를 통해 백성을 살폈던 세종의 업적과 그 뒷이야기를 통게가 전해드립니다.

515일은 스승의 날이죠? 하지만 이 날은 또 다른 중요한 날인데요, 바로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탄신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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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께서는 하늘 창제 외에도 측우기, 자격루 등의 과학기술과 물품의 개발, 전제개혁, 46진 개척, 농사직설의 편찬 같은 수없이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건 유명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이런 업적이 통계를 활용하여 세운 정책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이마 수백 년 전에 세종대왕이 필요성을 인식하고 활용한 통계의 힘. 과연 무엇이었을까, 함께 살펴볼까요?

 

백성의 의견을 들어라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는 세법으로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농사의 상황을 10, 10등급으로 나누어 손실이 한 분, 즉 한 등급이 내려갈 때마다 세금을 감하고, 8분이면 세금을 감면하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지방 향리들이 이를 제대로 측정하지 않아 부자가 세금을 덜 내고 가난한 자는 더 내는 등의 폐단이 일어나면서 세법을 개혁할 필요성도 커졌습니다. 이 때문에 세종은 새로운 세법 만들기에 들어가니, 이것을 공법(貢法)이라고 합니다.

 

이를 위해 세종은 1427(세종 9) 문과에서 이와 관련된 문제를 냅니다. 바로 선비들의 좋은 의견을 듣겠다는 의도였죠. 그리고 1428(세종 10)에는 본격적으로 논의를 하여 1430(세종 12)에는 기존의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토지를 상, , 3등전으로 나누어 농사의 풍흉에 상관없이 1결당 10두씩 징수하며, 홍수나 가뭄으로 농사를 완전히 망쳤으면 세금을 면제한다는 안을 내놓습니다. 보통 왕조시대라면 이렇게 안건을 내놓으면 조정에서 신하들과 찬반논의를 하고 시행여부를 결정하는데, 세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놀라운 결정을 내립니다.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세종실록>1430(세종 12)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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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정책시행을 위하여 대신들의 의견을 묻는 건 당연했으며, 관직에 있지 않은 선비라도 상소로 의견을 올리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공법 시행을 위하여 대소신료는 물론이고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의견을 묻기로 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통신도 발달하지 않았으며 지금 같은 국민투표 제도도 없었으므로 백성의 의견을 들을 방법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관리들이 백성의 집을 방문하여 그 의견을 직접 듣는 것이지요. 세종은 정첵 시행을 위하여 백성들의 생각을 취합하기 위해, 오늘날로 비유하자면 현장조사요원을 투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약 5개월 후인 1430810, 대소신료와 백성들의 의견을 물은 결과가 세종에게 보고됩니다. 여기서 관리를 제외한, 일반 백성의 의견을 들은 결과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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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1430(세종 12) 810

 

공법에 대해 응답한 백성의 찬반을 합치면 17만 명을 넘어 지금 기준으로도 매우 큰 규모의 조사였는데, 당시의 인구수가 지금보다 적고, 시대적 여건상 노비 등의 천민과 여성 등은 조사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 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실상 전 국민을 상대로 정책에 대한 통계 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찬성이 우세하긴 하지만 반대에 비하여 압도적이진 않고, 특히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등 비옥한 평야가 많은 지역은 찬성 여론이 많지만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같은 산지와 척박한 땅이 많은 곳은 반대 여론이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대 여론도 적지만은 않았기에 공법은 바로 본격적으로 실시되진 못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리한 정책시행이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백성의 의견을 참고하여 시행시기를 조율한 것은 분명 현명한 행위입니다.

 

조선식 농지 통계,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

 

그 후 세종은 1436(세종 18)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이 문제를 연구하고, 황희(黃喜) 등의 의견을 따라서 전국의 토지를 비옥하고 척박한 정도에 따라서 상등도(上等道중등도(中等道하등도(下等道)3등급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경상도, 잔라도, 충청도를 상등,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를 중등, 함길도(함경도)와 평안도를 하등으로 분류하였는데 이는 앞서 실시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각 도의 토지 상태에 따라 찬반이 엇갈림을 감안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3등도의 각 주군을 다시 각각 상··하등관(等官)으로 나누고, 9등관의 토지를 다시 상··하전()으로 나누어서 27종의 전등(田等)에 따라 각 세율을 다르게 적용하니, 1441(세종 23)부터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부터 공법을 시행합니다.

 

하지만 공법이 시행되면서 문제점이 드러나자, 다시 토지를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에 따라 토지의 결(()의 실적(實積)에 차등을 두는 수세단위로 편성하는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는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을 도입하여 공법을 보완하고 시행합니다.

 

세종의 공법은 시행 과정에서부터 백성의 의견을 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무작정 실행하면 지역에 따라 불만이 클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보완해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렇게 실시된 정책도 전국의 토지가 비옥한가 척박한가, 농사가 풍년인가 흉년인가 등을 조사하고 이를 등급을 나누어 실행하는 정책이었으니, 결국 공법은 정책을 세우는 단계에서부터 실제 진행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계를 바탕으로 한 정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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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위한 정책을 펴기 위하여 백성들의 의견을 듣는 통계를 내고, 정책을 실행하면서도 통계를 바탕으로 정책을 편 세종. 세종 때 공법 시행을 위해 진행한 양전(量田) 정리를 후대의 신료들이 보고는 어떻게 이걸 정리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통계를 내고 정책을 실행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종이 가진 애민의 뜻이 잊혀 지면서 공법에서도 폐단은 일어나지만, 만일 세종의 애민정신과 함께 통계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을 정교하게 다루는 능력까지 함께 계승되었더라면 그런 폐단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듭니다.

 

이렇게 백성의 의견을 받아들인 공법 체계를 만든 세종. 그 시대에 농사를 짓던 평범한 백성들의 의견을 통계를 활용해 받아들이기도 하였지만, 또한 그 백성들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통계를 활용하기도 하였는데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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