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 topic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머리맡에 두었던 휴대폰이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컴퓨터를 켜고 파랑색의 인터넷아이콘을 클릭했는데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하루 아침에 휴대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까요? 오래 생각해 보지 않아도 큰 혼란이 찾아 올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 된 휴대폰과 인터넷, 이들이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도 싫지만 불과 십수년 전 우리에겐 휴대폰, 인터넷은 단어조차 생소했던 낯선 것들이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가는 정보통신의 과정, 4월 22일 정보통신의 날을 맞아 그 의미와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발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정보통신의 날은 언제, 왜 생겼을 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문화재청)
 
 
 
 
 
정보통신의 날은  국내 최초의 통신업무 주무기관인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립된 날을 기념하는 한편, 정보통신의 중요성과 의의를 높이고,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다짐하며 관계 종사원들의 노고를 위로할 목적으로 제정된 기념일입니다. 한국에서 정보통신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것을 기념하고, 정보통신인들의 자세를 더욱 새롭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우편 · 체신금융 · 전기통신 · 전파방송 등 정보통신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그동안 이룩한 성과와 앞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일들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보통신 발전 모습

과거 마을에 한대밖에 없을 정도로 전화기가 귀하던 시절, 동네주민들은 연락할 곳이 있을 때 마을에 한 대뿐인 전화기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는 불편함을 겪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집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이동 중에도 원하는 곳에 언제든지 연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정보통신 발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데요, 먼저 정보통신 중 유선통신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선통신이란?

전송로에 도선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전기통신으로 전화와 초고속망(인터넷)으로 대표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국 최초의 국산 보급형 전화기
 
(조선일보, 1962)
 
 
 
 
 
한국에서 전화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된 것은 1898년이며, 대중들에게 보급이 시작된 건 1960년부터 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시내에 설치된 공중전화기(조선일보, 1960)
 
1982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면서 한국의 전화사업은 도약기를 맞이하였습니다. 1987년 1,000만 회선의 전화가 완비되어 1가구 1전화시대를 이루었으며, 1990년 10월 오산전화국 개통과 더불어 1,500만 회선을 돌파하여 세계 제9위의 전화시설 보유국이 되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료출처: 정보통신부)
 
 
위의 통계를 보면 시내전화의 가입자 수가 30년 사이에 큰폭으로 증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씩 증가하던 가입자 수가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증가를 거듭해 1970년대에 48만 명에 그치던 시내전화 가입자 수는 2005년 2,293만 명으로 약 50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 이르러서는 유선 기반의 시내전화보다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폰 사용량이 급증하고 있죠.
 
 
 
 
 
유선 통신의 초고속망(인터넷)
 
 
 
인터넷은 1982년에  도입되어 연구기관이나 국가기관에서 사용되었습니다. 1994년 이 후 인터넷이 일반인에게 상용화되어 대중화되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 인터넷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료출처: 방송통신 위원회 통계자료)
 
 
 
 
 
위 자료를 보면 1999년 부터 2009년 사이에  인터넷 가입자수가 크게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8년에 이미 가구당 인터넷 보급률이 95%를 넘었을 정도로 인터넷 보급이 빨리 이루어졌습니다. 이제는 대한님국 어느 곳을 가나 인터넷 환경이 구축되어 있다고 얘기할 정도로 인터넷 보급률이 높습니다.
 
 
 
 
 
무선통신이란?
 
 
 
무선통신은 케이블이나 광케이블 등의 전송로를 사용하지 않는 전기통신의 형태 또는 그 기술을 의미합니다. 한국의 무선통신은 1910년에 항로표지와 세관감시를 겸한 광제호와 월미도 등대에 무선국을 설치 · 운용한 것이 시초입니다. 1981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선호출 서비스를 일반인에게 선보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조선일보)
 
 
 
 
 
위 사진에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아시겠나요? 정답은 삐삐삐 울리는 호출음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삐삐'입니다. 삐삐는 휴대용 무선호출기 또는 무선호출 단말기 중 하나로 출시 당시 이동 중에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혁신적인 통신 기기로 여겨졌습니다.
 
1983년 국내 무선호출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등장한 삐삐는 처음에는 기업의 사업용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폭발적인 수요를 자랑하며 1997년에는 가입자 수가 1,5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일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 조선일보)
 
위 사진은 크기가 무전기만하고 무게가 700g이 넘어서 한 때 벽돌폰이라고도 불렸던 초기 휴대폰입니다. 한 기업이 1988년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회에 휴대폰 47대를 납품한 것을 시작으로 한국에 본격적인  무선통신 시대가 열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조선일보)
 
위 사진은 출시 당시 획기적인 디자인이라 평해지던 플립형 휴대폰입니다. 당시에는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였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죠. 이제 과거를 추억하게 해 주는 물건이 되어버렸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료출처: 방송통신위원회 통계자료)


 
 
위의 통계자료를 보면 1996년 이래로 무선통신 서비스 가입자수가 꾸준히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9년에는 서비자 가입자 수가 4,794만 명으로 1996년 313만 명에 비해 크게 늘어났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손안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다는 요녀석도

언젠간 추억이 되겠죠 ? ^^
 
 
 
 
 
 
 
 
 
 
 
 정보통신의 날을 맞이해 알아본 한국의 정보통신 발전 현황!
 
역시 정보통신 강국이라 불릴만큼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는데요.
 
그런 만큼 지금 이순간에도  더 편리한 통신 환경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고 계시는 관련 업종 종사자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 본 글은 '통계청블로그기자단'의 기사로 통계청의 공식입장과 관계가 없습니다. 
 
통계청 블로그 기자단 한보영 기자
 



 


 
 
 
 




 
 
 



신고
트랙백 TRACKBACK :0 개, 댓글 COMMENT :0 개가 달렸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화 한 대 값이 아파트 한 채 값이라면? 초등학생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는 세상에 무슨 소리냐 싶지만 불과 30년 전엔 그러했다.

1955년 전화가입자는 3만 9,000명으로 인구 1,000명당 2대꼴이었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통신사업 5개년 계획이 착수되자 전화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화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아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다.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전기통신법을 개정해 1970년 8월 31일까지 가입된 전화(가입자수 45만 7,280명)는 매매할 수 있도록 하되, 그 후 새로 가입된 전화는 금지했다. 전자를 백색전화, 후자를 청색전화라고 불렀는데 당장 전화가 필요한 사람은 비싸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백색전화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전화 값은 더 뛰어서 백색전화 한 대가 260만원까지 치솟았다. 서울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원 안팎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상을 초월한 가격이었다. 전화는 당당히 ‘재산목록 1호’일만 했다.

전화 값 거품은 1978년 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오면서 비로소 꺼지기 시작했다. 1986년 한국이 세계에서 10번째로 디지털식 전자교환기(TDX)를 독자기술로 개발하면서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서민의 통신수단으로 거듭난 것이다.
1988년 가입자 1,000만 명, 1997년 2,000만 명을 넘어 2007년 말 현재 2,313만 명에 이르러 국민 두 명 중 한 명꼴로 보급됐다.

한편, 전화가 귀했던 시절 공중전화야말로 서민의 애용품이었다. 국내 첫 무인 공중전화기는 1966년 6월 1일 시내 중심가 10곳에 처음 설치됐다. 시내·외 겸용 공중전화기는 1977년에 가서야 선보였는데 부스마다 시외전화를 걸기 위해 줄을 선 풍경이 낯익었다. 1982년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시내·외 겸용 DDD 공중전화가 나오면서 공중전화도 보편화됐다.

같은 해 한국통신공사(현 KT)에서 떨어져 나온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T)가 무선호출 서비스를 개시했다. 삐삐의 등장은 통신시장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1982년 235명에 불과했던 삐삐 가입자는 10년 만에 6,178배인 145만 2,000명, 1997년에는 1,519만 4,821명까지 불었다. 인구 세 명당 한 명꼴로 삐삐를 찼었다는 얘기다.

업계 1위였던 한국이동통신은 당시 세계 3위 가입자를 자랑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와 같은 숫자의 의미를 모르면 신세대 축에 끼지 못할 정도였다. 삐삐의 대중화는 공중전화의 보급도 가속화시켜 1997년 42만 3,502대까지 설치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삐삐의 시대는 채 20년을 못 갔다. 무선호출 서비스가 시작된 지 불과 2년 뒤인 1984년 서울 구의동 광장전화국의 구석방에서 직원 32명으로 시작한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차량전화 서비스팀이 국내 처음으로 카폰을 상용화했다. 첫 해 가입자는 2,658명에 불과할 정도로 실적이 초라했다. 통화 품질도 떨어졌으며 전화기가 너무 커서 일반국민들의 실생활에 쓰기는 곤란한 상태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이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이동통신 기술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면서 단말기와 통신료 문제가 한꺼번에 풀렸다. PCS 단말기는 휴대전화에 걸맞을 만큼 작아졌고 통신료도 쌌다. 기존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에 이어 1996년 PCS 사업자 3곳이 새로 시장에 진입했다.

PCS폰의 등장은 1997년을 정점으로 삐삐와 공중전화 시대의 퇴조를 불러왔다. 한때 신세대 젊은이의 필수품이었던 삐삐 가입자는 2008년 1월 말 현재 3만 9,513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공중전화 역시 1997년 이후 줄곧 줄다가 2002년 월드컵 때 다시 44만대 수준으로 늘었으나 그 이후 다시 급감해 2005년 14만대 안팎으로 줄었다.

반면 1996년 318만 989명이었던 휴대전화 가입자는 1년에 두 배씩 늘어나 1998년 1,000만 명, 99년 2,000만 명, 2002년 3,000만 명에 이어 2006년 4,000만 명 시대를 열었다. 2008년 1월 말 현재로는 4,374만 5,450명에 달한다.

신고
트랙백 TRACKBACK :0 개, 댓글 COMMENT :0 개가 달렸습니다.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