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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달콤한 황금연휴를 맛본 당신! 6월 달력을 보자마자 실망하시진 않았나요~? 6월에 있는, 단 하나의 공휴일인 현충일이 바로 토요일이기 때문이죠ㅠ.ㅠ 여기서 기습질문! 현충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계신가요? 어린 조카가 와서 "현충일이 뭐야~?!"라고 물어보면 제대로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현충일을 단지 쉴 수 있었던 날로만 그쳐서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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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14년 매일경제신문에서 서울 시내의 초중고 학생 84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많은 학생들이 현충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용 출처 : 매일경제신문 / 디자인 출처 : freepik)

여기서 눈여겨볼 사실은 초등학생들보다 중·고등학생들이 오히려 현충일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공휴일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는 시간을 갖지만, 중고등학교에서는 학업에 열중하기 바빠 이와 같은 시간을 갖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학업에 치이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당연히 현충일의 의미를 다 알 것 같은 어른들도 바쁜 사회생활에 쫓겨, 정작 현재 우리를 있게 해주신 분들을 기리는 마음은 줄어들고 현충일을 그저 노는 날로만 여기지 않았을까요...? 저 또한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됩니다ㅠ.ㅠ 

 


 

<현충일(日)이란>

매년 6월 6일로,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 및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는 날이다.

(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출처 : flickr)

 

'에이, 설마 현충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까' 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O.X 퀴즈를 내보겠습니다.

  • * 현충일 날짜는 절기를 고려해서 제정되었다.

  • * 현충일의 추모대상은 6.25 전쟁때 전사한 국군들이다.

  • * 현충일에는 현충원에서만 조의를 표할 수 있다.

 

 

(사진 출처 : MBC 진짜사나이)

어때요? 다들 자신있게 푸셨나요~? 헷갈리셨던 분들! 이번에 현충일에 관해 새롭게 알게되신 분들! 이제 답을 알려드릴테니 모두 집중해주세요!!!

생각중

 

현충일 날짜는 절기를 고려해서 제정되었다 (O)

24절기 중 하나인 망종은 조상들이 수확에 대한 감사와 풍년이 들게 해주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입니다. 더불어 이 날 조상 묘지에 성묘를 하는 풍습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1956년 현충일 제정 당시 망종일이 6월 6일이었기 때문에 이 날이 현충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현충일의 추모대상은 6.25전쟁 때 전사한 국군들이다 (X)

현충일의 추모 대상은 6.25 전쟁 때 전사하신 분들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넋까지 기립니다. 즉,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모든 분들을 애도하는 날입니다.

현충일에는 현충원에서만 조의를 표할 수 있다 (X)

현충일 오전 10시,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기 위해 1분간 묵념 사이렌이 울립니다. 현충원이 아니더라도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1분간 묵념을 함으로써 애도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현충원에 직접 방문하기 어려운 유가족이나, 현충일 당일 참배하러 가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해 현충원 홈페이지에서 사이버 참배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 : www.snmb.mil.kr / 국립대전현충원 : www.dnc.go.kr)

 



모두 정답을 맞추셨나요~?! 다 맞추지 못하셨더라도 현충일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셨다면 기사를 쓴 보람이 느껴지네요 :) 

이제 현충일의 의미와 관련 지식들을 바로 알았으니 이번 현충일은 토요일이라고 슬퍼하지만 말고, 순국선열하신 분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을 갖도록 해요!



※ 본 글은 '통계청블로그기자단'의 기사로 통계청의 공식입장과 관계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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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무수한 업적이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지난 번 소식 기억하시죠? (지난 포스팅 보기) 6월 5일(음:4월 16일)곡식의 씨를 뿌린다는 망종(亡種)이었습니다. 망종 전후는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하느라 바쁜 시기인데요. 세종대왕은 농사직설을 편찬해 농민들이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농업의 과학화를 만든 위대한 군주이기도 해요. 농업은 지금도 중요한 산업이지만, 제조업이 미약했던 조선시대에는 국가 산업의 전부였습니다. 농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었죠. ‘農者天下之本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고요.




위대한 군주 세종은 재위기간 측우기를 개발하고, ‘농사직설을 편찬했습니다. 이것 역시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 여러분도 눈치 채셨죠? 이번에는 통계의 힘으로 애민(愛民)을 실천한 세종대왕의 모습을 살펴보도록 할께요.



 

농업의 통계를 집대성하다! <농사직설>




<농사직설(農事直說)>은 세종대왕이 정초(鄭招) 등에게 명해 1429(세종 11)에 편찬한 농서입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중국의 농서를 사용해 농사를 지었는데요. 중국과 조선의 기후 및 환경 차이로 오류가 많았죠. 그래서 세종은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로 한 것입니다.



 


김홍도 풍속화 논갈이

 


<농사직설>은 먼저 일반론으로서 종자와 토양을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는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다루는 작물이 곡식류에 국한되긴 하지만 당시로서는 과일 재배가 흔치 않고, 곡물 재배가 농업의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역시 대단한 정리임에 틀림없습니다.


<농사직설>이 통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여러 역사적 기록에서 전하고 있어요.



“(전략)오방(五方)의 풍토(風土)가 같지 아니하여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각기 적성(適性)이 있어, 옛 글과 다 같을 수 없다 하여, 여러 도()의 감사(監司)에게 명하여 주현(州縣)의 노농(老農)들을 방문(訪問)하게 하여, 농토의 이미 시험한 증험에 따라 갖추어 아뢰게 하시고, 또 신() ()와 변효문(卞孝文)과 더불어 피열(披閱) 참고(參考)하여 그 중복(重複)된 것을 버리고 그 절요(切要)한 것만 뽑아서 찬집하여 한 편()을 만들고 제목을 농사직설(農事直說)이라고 하였다. 농사 외에는 다른 설()은 섞지 아니하고 간략하고 바른 것에 힘을 써서, 산야(山野)의 백성들에게도 환히 쉽사리 알도록 하였다.(하략)”

<세종실록> 1429(세종 11) 516

 

 

<농사직설>은 학자들이 책상 위에서 만들어 낸 책이 아니었습니다. 전국의 농업 전문가(각 지방에서 오랜 세월 농사를 지어 경험이 풍부한 농민)에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가 있고, 어떤 방법이 안 좋은 지를 모아, 이를 가리고, 수렴해 중복되는 점은 빼고, 중요한 점만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죠. 오늘날 통계 조사 방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 <농사직설>은 조선의 농업전문가의 경험과 지식의 통계를 바탕으로 우리 실정에 맞게 편찬한 농서였던 것이죠. <농사직설>은 한글이 창제된 후에는 일반 농민도 읽을 수 있게 한글로 번역돼 보급되었답니다. <농사직설>의 보급은 농업의 과학화와 농업생산력 증대에 기여하게 돼요.

 

 

 

조선의 강우량을 통계하다, <측우기>

 

 

농사를 결정짓는 것은 날씨입니다. 특히 비는 농사의 성패에 결정적 요소입니다. 가뭄과 홍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농작물의 피해를 줄여 농업생산력 증대에 효과를 볼 수 있죠.

 

 

하지만 비를 내리고, 그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밖입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비를 마음대로 내리게 할 순 없지만, ‘비가 내리는 양을 알고 조사할 순 없을까?’라는 의문에서 비가 온 양을 측정하는 물건, 측우기를 발명하게 됩니다. 측우기는 일반적으로 세종의 신하였던 장영실이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세종의 세자였던 문종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졌다는 학설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세종실록>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고요.


 

 

“(전략)근년 이래로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적확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괴인 푼수를 실험하였는데, 이제 이 물건이 만일 하늘에서 내렸다면 하필 이 그릇에 내렸겠는가.(하략)”

<세종실록> 1441(세종 23) 429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진품인 금영 측우기

 

 

 

측우기 발명은 조선에 획기적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세종대왕은 측우기 발명 이후 8도에 측우기를 보내, 지역의 강수량, 비가 내리고 그친 시간을 기록하게 하는데요. 이런 식으로 전국 강우량을 측정하고, 비와 관련한 통계를 축적하니 지역별로 비가 많이 오거나 적게 내리는 시기, 비가 충분히 내릴 때와 적게 내릴 때를 예상해 농업에 적용할 대비책을 마련하는 등의 조치가 가능해 졌지요.

 

측우기를 통한 강우량 측정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중단되었다가 영조시대를 거치며 다시 시행되는데, 정조 때 이르면 전년도 동월의 강수량과 올해 강수량을 비교할 정도로 통계를 모은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습니다.

 

<농사직설>이 농업 통계를 모은 결과물로 백성을 도운 것이라면 측우기는 백성을 돕기 위한 통계를 보다 정확하게 내기 위해 만든 발명품이었던 것이죠.

 

우리 역사상 최고 군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군으로 추앙받는 데는 그의 애민정신은 물론, 백성을 위해 통계와 같은 효율적 방법을 활용해 빛나는 업적을 남겼기 때문일 겁니다. 통계의 힘을 적절히 활용해 백성을 위한 정책을 세우는 것은 오늘날에도 본받을 수 있는 통치의 교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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