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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6]


대동여지도 속에 담긴 통계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도라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떠올리실 겁니다.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대동여지도>는 지형이 정확히 기록된 것도 물론이지만, 여백에는 별도의 도표를 삽입하여 더욱 자세한 내용을 싣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통계 정보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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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까요?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진 때는 고종 초기,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무렵입니다. 어린 시절 김정호 위인전에서는 <대동여지도>에 대하여 이런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지도는 많이 부정확하였기 때문에 김정호는 자세한 지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선 팔도를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백두산은 여덟 번이나 올라가며 지도를 만들어, 마침내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지만, 그걸 몰라본 조선 정부는 김정호가 적국을 이롭게 한다며 하옥시켜 죽이고, <대동여지도>의 목판을 불태워 없앴다.

과거에 위인전에 이런 내용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김정호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참고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는 것과는 달리 관리의 협조를 받아 행정용이나 군사용 지도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일부 지역을 답사했을 수는 있지만, 김정호가 조선 전체를 다 확인해야 할 정도로 당시의 지도가 형편없는 것은 아니기에, 대부분의 지도가 일치하는 지역이라면 굳이 답사할 필요까진 없었을 겁니다.

목판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숭실대학교와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대동여지도의 목판 일부가 남아있는 데다가, 舊 총독부 건물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지하 수장고에 있던 <대동여지도> 목판이 발견되어 조선시대에 불탔다는 것도 거짓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김정호가 힘들게 <대동여지도>를 만들고도 탄압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건 일제강점기 때 교과서 <조선어 독본>에 그렇게 실린 영향 탓입니다. 지금은 학계의 연구로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릴 때 위인전을 읽은 영향인지 아직도 잘못 아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완전히 새로운 지도라 훌륭한 것이 아닌 기존 지도의 집대성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그 사실은 분명히 알아야겠죠?


<대동여지도>에 담긴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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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안(方眼)으로 하여 한 개 면(面)으로 하고, 2개 면은 한 개 도엽(圖葉)인 목판 한 장에 수용하였습니다. 전체 지도 도엽은 목판 121매이고, 책으로 인쇄할 때의 면수는 213면입니다.



여기에 부록에 해당하는 지도유설·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추가되어 실질적인 도엽은 126목판이고, 전체 면수는 227면으로 접으면 책처럼 지역별로 볼 수 있고, 펼치면 하나의 큰 지도가 됩니다.





<대동여지도>를 사진으로만 볼 때는 크기가 실감이 제대로 잘 안 나지만, 실제 크기는 가로 4m, 세로 7m에 달하여 큰 방의 바닥에 펼쳐 놓아야 제대로 살 필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동여지도>의 제1첩에는 지도 여백에 지도표나 도성도(都城圖), 경조5부도(京兆五部圖) 등이 실려 있고, 제2첩 여백에는 당시의 지역별 통계가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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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동여지도>에 따라 조선 후기의 지역별 인구, 호구 정보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따르면 당시 조선 인구는 600만 명을 넘어가는데, 이는 정조시대 760만을 넘긴 기록이 있는 것에 비하여 줄어든 것입니다. 정조시대와 흥선 대원군 집권기 사이에 큰 전쟁이 없는데도 인구가 줄어든 것은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피폐해지면서 유랑민 증가로 통계로 벗어난 인구나 죽은 사람이 늘어난 결과로 보입니다.

통계의 문란이 나라의 문란을 부르다 - 삼정의 문란 (클릭 시 해당 링크로 이동됩니다.)

<대동여지도>에 실린 통계정보 내용은 지역별 인구와 호구 수 외에도, 당시의 통신과 교통 체계인 지역별 봉수대와 역참의 숫자, 창고의 숫자, 지방에서 국고로 들어오는 곡식의 양, 토지, 군사시설 등의 통계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조선의 각 지방에 대한 여러 가지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작한 역사왜곡 임에도 불구하고, '외적에 도움을 준다는 누명으로 김정호는 옥사하였다' 라는 내용이 믿어졌던 건 지도가 정확한 것 외에도 위처럼 상세한 정보가 담겨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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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정보와 통계의 결합은 오늘날에도 국가행정은 물론 산업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는데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들도 지리정보시스템(GIS)을 이용하여 지역별로 소비자 현황이나 매출액 같은 통계정보를 파악하여 마케팅에 활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지도에 통계정보를 더한 <대동여지도>나 지난 주에 소개해 드린 지리지는 지리정보와 통계정보를 결합시킨 선구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통계청이 진행하는 인구주택총조사와 경제총조사 역시 지역단위로 진행하기에 과거의 지리지나 <대동여지도> 같은 지역별, 그리고 전국적 통계정보를 망라하는 점에서 비슷한데요, 여기에 현대에도 지리정보시스템과 통계정보를 결합해 활용한다면 더욱 유용하게 우리 삶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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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www.xn--jackenonlinesterreich-sec.com 2013.12.15 05:13 신고 ADDR EDIT/DEL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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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통계 5]



지역 통계 정보를 담은 문서

조선 지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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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 노래 가사에는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셋째 줄'이라는 내용이 나오죠?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릉도는 '무릉', 독도는 '우산'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오래 전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지형이나 기후, 토질 같은 지리 정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중요한 정보입니다. 이런 지리 정보는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물론이고, 농사에 어업, 상업 등의 산업에 끼치는 영향도 클 수 밖에 없으며, 때로는 전쟁의 승패를 바꾸는 요인이 되기도 하니 중요하게 취급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동양 여러 나라에서는 '지리지'를 발행하여 지리 정보를 정리했습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지리 정보는 국가적으로 정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의 지리지는 전하지 않고 <삼국사기>, <고려사> 같은 후대에 편찬한 역사서에 지리지가 들어가 있으며 그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당시의 지리 정보를 담은 지리지가 편찬되었는데, 그 중엔 소실된 것도 있지만 지금까지 전하고 있는 지리지도 있습니다.

역사서의 일부로 편찬된 지리지와 조선시대에 역사서와 따로 편찬한 지리지는 내용상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왕조의 역사서의 일부로 편찬한 지리지는, 과거의 연혁이나 지명의 변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수백 년간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호구 조사 같은 통계 내용을 모두 담을 순 없다는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서와 별개로 편찬한 조선시대 당시의 지리지는 편찬 시점의 통계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지리지로 대표적인 것이 처음에 언급했던 <세종실록 지리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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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지리지

 

조선의 기틀이 다져지면서 여러 제도와 문물이 정비되었기에 자주 소개해드린 세종시대엔 당연히 지리지 편찬도 이루어졌습니다. 1424년(세종 6년)에 조정에서는 지리지의 편찬에 착수하여 예조(禮曹)에서도 각도(各道)에 통첩을 보내어 조정에서 정해준 양식에 따라 지리 편찬의 자료를 조사·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양식에 따라서 각 도 및 관할 고을의 연혁과 변천사, 그리고 도의 인구 및 호구수에 대한 내용을 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 1432년(세종 14년)에 조선은 <신찬팔도지리지>를 편찬할 수 있었습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내용이 반영되어 있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역사서에 지리지가 들어가는 건 <삼국사기>와 같은 기전체 사서에 해당하는 일이고, <조선왕조실록>같은 편년체 사서에는 따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세종시대에는 워낙 자료가 방대하여 <신찬팔도지리지>를 보완한 <세종실록 지리지>가 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찬팔도지리지>가 인구와 호구수를 조사 양식에 담은 만큼,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독도가 우리 땅인 증거 외에도 세종시대의 조선 호구와 토지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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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온 전국 인구 및 토지 통계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 번성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초기에 몇 년이나마 수도로 있었으며,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 살던 사저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는 등 여전히 중요한 도시였기에 한성과 함께 내용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었던 만큼, 농사를 지을 토지가 많은 지역이 인구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보다 더 작았던 한성 인구가 함길도와 강원도보다도 많고, 인구가 많은 경상도의 인구와 비교해도 40%가 넘는 점을 보면, 서울로의 인구 집중은 조선시대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구 뿐 아니라 육군과 수군의 각 도별 배치 같은 군사 통계 등도 정리되어 있어 전쟁사 연구에도 도움을 주는 등 여러 가지로 조선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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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동국여지승람

 

이후로도 지리지 편찬은 이어져서 세조도 즉위 후 <신찬팔도지리지> 이후 달라진 상황을 보완할 지리지의 편찬을 명령합니다. 이 지리지는 세조의 손자 성종이 즉위한 후에 완성되는데, 이것이 <팔도지리지>입니다. <팔도지리지>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그 내용 중 일부를 구성했을 <경상도속찬지리지>를 통해 어떤 내용이 담겼을지 짐작할 수 잇습니다.

<경상도속찬지리지>는 경상도 관할 고을의 연혁과 변천, 그리고 재정이나 경제 관련 통계, 산업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팔도지리지> 역시 각 도별로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지리지에 당대의 인구 통계 정보가 실렸던 것은 아닙니다. 역시 정부에서 편찬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연혁과 함께 그 지방의 여러 특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지만, 인구나 호구 정보까지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각 고을별로 유명한 산천이나 행정정보, 유명 인물, 토산물에 대한 정보가 남아있기 때문에 이런 자료를 꼼꼼히 연구한다면, 당시 조선의 토산물이나 인물에 대한 지방별 통계를 조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유용한 자료 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지리지는 통계 정보를 담으면서 더욱 유용한 자료가 되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지리지 뿐 아니라 지도에도 통계 정보가 들어가 오늘날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됩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도 <대동여지도>가 그 예인데요,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도 안에 통계가 들어갔는지는 다음 회에 살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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